지금도 비텐베르그 대학교 박물관에는 루터 당시 판매되었던 다양한 종류의 면죄부들 전시되어 있다. 필자는 비텐베르그 박물관에서 온갖 종류의 면죄부들을 목격했다. 당시의 모든 평신도들에게 로마가톨릭의 허구적 교리를 깨우쳐 준 루터의 희생적 수고가 없었더라면 지금도 이런 면죄부를 판매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정말 루터의 선구자적 노력에 대해서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1530년에 독일 아우구스부르그에서 Jörg Breu the Elder가 만든 목판화.

교황권을 상징하는 십자가를 들고 있는 신부와 수도사가 있고, 그 옆에 높이 나무 위에 걸려있는 것이 당시 판매되던 면죄부다. 판매촉진을 알리려는 홍보용으로 걸어 둔 것이다. 조상들과 이미 죽은 여러 사람들의 이름을 가운데 써 넣을 수 있도록 크게 만들어진 사면서는 비싼 값을 요구했다. 증서 하단부에 주렁주렁 돌이 달려있는 것은 교황청이 발행하지 않은 가짜 면죄부와 구별하기 위해서 진품임을 보증하는 장식품이다. 그 당시 유럽에서는 물가가 폭등하였는데, 첫째는 교황이 판매하는 면죄부 값이 너무 올라갔기 때문이고, 상인들이 폭리를 취하려 물건 값을 올렸으며, 불량화폐 제조로 인해서 물가가 폭등하였다.

 
루카스 크라낙의 판화.

루터는 1521년 면죄부를 판매하는 교황에 대해서 적그리스도라고 공격했다. 교황이 왼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면죄부이다. 오른 손으로는 새로운 면죄부에 서명하고 있다.

면죄부 끝에는 서 너 개의 매끄러운 돌이 달려 있다. 교황청이 발행하는 진품의 표식이다.

독일 지방에서는 면죄부 사건으로 촉발되었지만, 유럽 각 지역에서는 성경에 의존하여 낡은 관행을 고쳐야 한다는 설교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루터의 글과 사건들이 소개되면서, 이후에는 수많은 종교개혁자들이 앞 다투어 일어났다. 독일 주변의 나라들에 확산되어졌고, 네델란드, 보헤미아, 스위스 각 지역과 독립도시들, 프랑스 변방의 도시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전지역에서, 폴란드 헝가리 북부 유럽 핀란드에까지 수많은 희생과 헌신적인 수고를 통해서 각 지역마다 진정한 기독교 신앙을 개신교회라는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내었다. 개신교회의 신학원리와 예배, 성경해석과 설교 등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개혁주의 공통분모가 엄청난 변화의 물결을 만들어내었다. 마침내 스위스 제네바에서 칼빈이 정착시킨 개혁교회의 체계가 유럽 지역과 미국 등으로 퍼져나가면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계속>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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