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명혜 한국YWCA연합회 회장, 민혜원 광주YWCA 회장, 조종남 서울YWCA 회장, 양선희 서울YWCA 사무총장, 서옥희 광주YWCA 사무총장(왼쪽부터)이 ‘회개와 고백의 기도’를 낭독하고 있다.

“선지자로서의 외침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예언자로서의 사명에 주저했습니다. 가진 것들을 지키기 위해 부끄럽게도 권력자들과 타협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뼈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현실의 아픔을 되새기며 주님 앞에 회개하며 고백합니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암울한 시절인 1922년 ‘암매(暗昧)한 여성사회에 빛이 되고자’ 창설된 YWCA가 창립 95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이같이 ‘회개와 고백의 기도’를 드리고, 일제침략과 독재정권, 민족분단에 침묵, 타협, 외면한 것에 자성의 목소리를 냈다.

YWCA가 95년의 역사 속에서 설립 목적에 얼마나 충실했고, 또 기독여성으로서 사회책임을 잘해 왔는지 되짚어 보기 위한 95주년 기념예배 및 기념식이 지난 21일 서울 중구 이화여고 100주년기념관에서 ‘고백’을 주제로 열렸다.

‘고백’은 YWCA 초기정신을 되새기고 회복하자는 뜻의 ‘과거를 돌아보다’(Go Back), 지금의 역사가 있기까지 우리 모습을 회개하고 성찰하자는 ‘오늘을 고백하다’(告白), 내일을 향한 비전과 희망의 행진을 시작하자는 ‘100년을 향해 나아가다’(Go 100)란 뜻을 담았다.

이날 현장에선 한국YWCA연합회 이명혜 회장을 비롯해, 광주YWCA 민혜원 회장과 서옥희 사무총장, 서울YWCA 조종남 회장과 양선희 사무총장 등 등 5명이 ‘한국YWCA 95주년 회개와 고백의 기도’란 제목의 고백을 통해 지난 과거를 성찰하고, 역사에 대한 시대적 책임감을 다시 한 번 인식했다.

이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보다 우리의 영광을 추구하고, 정의와 평화와 생명이 넘치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일에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지 못했다”면서, “이제 조용히 부끄러움과 아픈 회개의 마음을 꺼내놓고 고백하오니 우리의 얼굴을 살피시고 우리 기도를 들어주소서”라고 간구했다.

그러면서 암울한 일제시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고달픈 민중의 희망이 되고자 온몸을 바쳤던 YWCA 일꾼들의 고통과 희생에 눈감았음을 고백했다.

이에 “간절히 자주독립을 원했으면서도 일제의 침략전쟁에 침묵하고, 조국의 젊은이들이 전쟁터로 내몰리고 소녀들이 짓밟히고 있음에도 눈 감고 귀 막음으로써 정의이시고 평화이시며 생명이신 하나님 앞에 죄를 범했다”면서, 스스로 일본YWCA에 속함으로써 이 땅에 조선YWCA를 세운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음을 고백했다.

또한 독재정권의 탄압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키려고 싸우던 이 땅의 청년, 노동자, 농민들이 희생될 때, 온전히 이들과 함께하지 못했던 과오와 젊은 여성들이 YWCA의 주체라고 하면서도 이들의 열망을 존중하며 목소리를 듣고 변화의 주체로 세우는 데 힘을 쏟지 못했음을 고백했다.

이밖에도 △평화를 위해 일하라는 소명을 받았음에도 70여 년간 분단의 고통이 계속되는 이 땅의 미움과 갈등을 멈추고 사랑과 평화를 전하는 데 용감하게 나서지 못했음 △하나님 아래 온 인류가 한 자매이고 형제임을 고백하면서도 이 땅의 가장 아프고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이들을 보살피고 사랑하는 데 소홀했음 △물신주의와 성장주의로 신음하고 아파하는 이 땅에 영성 회복과 생명살림을 위해 노력하기보다 양적 성장과 겉모습을 유지하는 데 더 많은 힘을 기울였음 등을 고백하고 “부끄럽고 아픈 마음으로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고백하오니 우리를 용서하소서”라고 기도했다.

이들은 또 전후 독일교회가 했던 죄책고백을 떠올리며 “더 용감하게 증언하지 못했고, 더 진실하게 기도하지 못했으며, 더 즐겁게 믿음으로 살지 못했으며, 더 뜨겁게 사랑하지 못한 데 대하여 우리는 자신들을 책망한다”고 회개했다.

끝으로 이들은 “95년 전 이 땅 여성들의 가슴에 불 밝히신 각성과 소명의 빛을 다시 우리들 가슴 속에 뜨겁게 밝혀 100주년을 향한 새날을 준비하게 하소서. 우리 YWCA가 95년 동안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을 위해 일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드러내게 하신 소명을 다시 깨닫게 하소서”라고 기도했다.

이날 기념식에서는 데보라 토마스 세계YWCA 회장을 비롯해, 후지타니 사토코 일본YWCA 회장, YWCA 사무총장 출신의 1922년생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 한국 최초 여성 기독교교육학 교수인 주선애 한국YWCA 명예연합위원, YWCA 제12회 한국여성지도자상 대상 수상자인 김영란 전 대법관, 황진 한국YMCA전국연맹 이사장, 사회적기업 볼런컬쳐 대표인 청년기업가 고다연, 2012년생 이수민 광주YWCA어린이집 회원 등 국내외 인사들의 축하와 당부도 이어졌다.

특히 일본YWCA는 “일본이 아시아 여러 나라를 침략한 것을 포함해 과거 역사에 대해 깊이 사과하고 용서를 빈다”면서,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해서는 안된다는 자각을 바탕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밝혔다.

1959년부터 1962년까지 YWCA 총무(사무총장)를 지낸 각별한 인연이 있는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은 “과거를 반성하는 사람이 더 나은 미래를 개척할 수 있다”며, 여성운동에 대한 YWCA 기여를 평가했다. ‘김영란법’(부정청탁금지법) 입안으로 우리 사회 청렴도를 높이는데 기여한 김영란 서강대 석좌교수도 “회개와 성찰로 새로운 100년의 기초를 놓겠다는 다짐이 더욱 대단하다”며 YWCA의 용기 있는 고백을 응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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