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전기 기기 내부는 기기끼리 전기간섭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절연판이 있다. 일종의 차단벽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절연판과 같은 벽이 있다. 이 벽으로 인해 소통이 단절되고 원수가 되어 살아가는 일이 벌어진다. 더 나아가 형제와 형제가, 나라와 나라가 서로 갈라져서 분쟁하고, 원수가 되고, 적대시하고, 파괴를 일삼는 일이 벌어진다. 지금의 남과 북은 그 극단을 달리고 있다.

저 옛날 에스겔 시대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 사이도 그랬다. 상대를 제압시키려고, 서로가 주변의 강대국에 비굴하게 의존했다. 결국은 두 왕국 모두 나라의 주권을 잃거나, 이방 나라의 포로가 되었다. 어떻게 해야 이 파멸의 덫을 벗어날 수 있을까? 에스겔은 남과 북의 갈라진 형제가 하나 되는 것만이 평화의 길임을 확신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이 에스겔의 평화 사상은 시편에도 나타난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 133:1). 형제자매 즉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이 연합하여 함께 하는 모습이 “선하고, 아름답고, 완전하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사는 세계도 에스겔이 겪은 세계와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바울은 인간과 세계를 좀 더 본질적으로 갈파한다. 바울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로막힌 담을 무너뜨린 분으로 인식했다. 스스로를 희생하여 화해의 제물이 되신 분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계 만민은 하나의 권속이 라고 선언한다(엡 2:14-19). 에스겔과 시편 시인이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이 형제자매로 연합하는 걸 평화의 길로 여겼다면, 바울은 평화의 범위를 인간 존재와 세계 만민으로 확장한 것이다.

지금 한반도가 위태롭다. 한반도의 불행을 세계의 불행이고, 한반도의 평화는 세계 인류의 평화이기도 하다. 그만큼 한반도는 세계 최악의 화약고가 되어 있다. 달리 방법이 없다. 남과 북이 극단적 대립을 막는 길은 서로 형제자매로 받아들이는 것밖에 없다. 대통령 후보자들이 나라의 안보를 빌미삼아 극단의 대립으로 몰고 가는 언행은 삼가야 한다.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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