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택해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신다고 했다. 그런데 이방인이 구원을 받게 된 것에 대해 말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구원받게 된 것은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에 접붙임을 받은 것이니 이스라엘 백성에게 감사하라고 한다. 비록 불순종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의 역사에서 멀어졌지만, 언젠가는 이스라엘 백성이 회복되어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불순종에 가둔 것은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불순종에 빠진 사람을 정죄하지 않고, 그들을 하나님의 긍휼에 맡긴다. 이것은 죄 많은 사람에게 더 큰 은혜를 베풀고, 불순종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을 결국 구원에로 이끄는 하나님의 역사 경륜을 찬양한다.

“형제들이여 나는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형제들이여”는 아주 좋은 말이다. 바울은 이 부름의 말을 자주 사용한다. 바울은 교회를 세운 사람으로서, 사도로서, 가르치는 자로서 겸손함을 나타낸다. 친밀함도 나타낸다. 형제들이이라고 부름으로써 신분적인 차이나, 상하관계를 부정한다. 나는 여러분과 대등한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왕과 신하, 장군과 졸병, 주인과 노예의 신분질서가 엄격했던 시대에 모든 교인들에게 ‘형제들’이라고 부른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형제들’이란 말 속에는 인간 모두가 평등하다는 진리가 담겨져 있다. 예수님은 낮은 곳에 오셔서 유대인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천대를 받으며,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과 친구가 되어 역사의 현장에서, 이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다.

기독교는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신분의 차이를 넘어서서 서로 형제라고 부르며, 남녀가 평등하다는 것을 밝혔다. 집안에 틀어박혀 있던 여자들이 세상에 나와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며, 상놈이 신식교육을 받는 기회가 주어졌다. 이것은 한마디로 교회의 공로였다.

말은 생각과 정신을 담는 그릇이라고 한다. 신분적 차이를 나타내는 말을 쓰면 생각과 정신도 그렇게 된다고 한다. 기독교는 이 땅에 들어와 지위가 높고 낮은 것을 가리지 않고, 형제라고 부른 것은 이 나라에 새로운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펼친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인은 서로 형제라고 부름으로써 인간 위에 인간 없고, 인간 아래 인간이 없는 평등한 나라, 정의가 강물처럼 흘러넘치는 정의의 나라, 인정이 흘러넘치는 인정의 공동체를 이루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함께 이 땅에서 이루려고 했던 새로운 나라, 하나님의 나라이다.

형제들이란 혈연적으로 굳게 결속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형제는 같이 먹고, 같이 사는 공동 운명체이다. 형제 관계는 핏줄로 이어진 관계이므로 끊을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형제라고 불렀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맺어진 형제인 것이다. 바울은 만나본적 없는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을 형제라고 불렀던 것이다.

“만나본 일은 없지만 우리는 서로 하나입니다”

우리는 서로 동등하고 서로 하나라는 뜻을 담은 ‘부름’ 말은 얼마나 좋은 말인가. 세상 사람들은 세도 불리고 몰인정하게 굴지만, 그리스도인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뜻이 ‘형제들’이란 말 속에 담겨 있다. 얼마나 인정 있는 말인가. 죽음 앞에서는 형제를 먼저 구하지 않는가. 힘든 일이 있으면 함께 나누지 않는가. 형제를 찾지 않는가. 좋은 말이기 때문에 나쁜 사람들도 이 말을 쓴다. 사람들은 가둬 놓고 짐승처럼 학대하며 죽이는 생지옥을 만들어 놓고도 ‘형제 000'이라고 이름을 붙이지 않았는가.

인천 갈릴리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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