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능하신 하나님 대신 시장 등장

우리는 세계화시대, 글로벌시대에 살고 있다. 새로운 세계화는 소련연방의 붕괴와 동구권의 해체로 냉전체제가 사라졌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일극체제로 변했다. 20년이 지난 오늘 세계는 자본주의적 질서가 자리를 잡았다. 여기에 중국이 미국의 일극의 경제체제에 도전, 새롭게 급부상하고 있다. 세계는 미국을 중심으로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문화적 영역에서 새로운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지금 세계는 이념간의 갈등에서 벗어나, 종족간, 종교간에 수난을 겪고 있다.

미국 전대통령 부시는 이것을 ‘새로운 세계질서’라고 불렀다. 미국은 유럽과 일본을 두 극으로 삼아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확고히 했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확산시켰다. 그럼에도 미국은 신무기를 계속해서 개발, 인류를 화학고 안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아무튼 세계화의 사상과 의지는 신약성서의 전통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헤어지기 전, 마지막 선교명령을 전달했다.

“너희는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의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계를 주어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태복음 28장19-20절)

지중해 연안을 거쳐 유럽 전역으로 퍼진 기독교의 세계화는 15세기 자본주의의 발흥과 함께 항해술이 발달하면서 급속하게 세계로 번져 나갔다. 유럽인들의 세계화는 처음 콜럼버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세계화는 자본주의적 욕구에서 출발했다. 기독교의 세계선교 명령도 여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신대륙을 향해 출발한 콜럼버스는 “하나님이 승리하실 것이다. 지구상에 있는 백성들의 우상을 비로 쓸어버리고 그들이 처한 곳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게 할 것이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도를 굳게 믿었다. 그리고 아메리카 신대륙을 향해 항해했다. 유럽인들에 의해 시작된 기독교적 세계선교는, 콜럼버스의 자본주의적 세계지배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종교와 정치의 결합이 중세 말에 와서는 자본주의와 기독교 선교의 결합으로 교체되었다.

기독교 선교의 꿈과 자본주의 의지의 결합으로 본격화된 세계화는, 500년이 지난 오늘 자본주의의 승리로 나타났다. 독일의 시사 주간지 <슈미켈>은 콜럼버스의 미 대륙 500주년 특집에서 기독교선교를 뛰어넘는 자본주의 세계승리의 결과를 한마디로 평가했다.

“전능하신 하나님 대신 시장이 등장했다. 이 신의 현현은 다우존스 주가지수이고, 그의 성체는 미국의 달러이며, 그의 미사는 환율 조정이고, 그의 나라는 지금 크램린의 지도자들까지 찬양하는 자본주의적 보편 문명이다”

한마디로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역사의 주관자이며,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보편 문명인 시장이 지배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세계화를 통해서 등장한 새로운 세계질서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다. 고 손규태 박사는 자신의 저서 <세계화시대 기독교의 두 얼굴>(2007년, 한울 아카데미)에서, 새로운 세계질서의 특징을 세 가지로 요약했다.

“하나는 새로운 형태의 제국주의인 미국의 자본주의적 경제력이 세계의 모든 정치, 경제, 문화를 지배하는 세계체제가 만들어 졌고, 다음은 동서의 정치적, 이념적 대결구도는 종식되었지만, 북반구의 부유한 나라들과 남반부의 가난한 나라들 사이의 경제적 대결로 인한 열전체제가 등장했다. 한마디로 경제적 빈부의 대결로 분열된 것이다. 새로운 세계화는 곧 ‘강요된 빈곤’, ‘새로운 빈곤’을 등장 시켰다. 마지막으로 국가와 국가, 공동체와 공동체, 개인과 개인 사이의 연대성이라는 인류의 귀중한 가치를 파괴하고 이들을 무한 경쟁의 세계로 몰아넣었다”

공동체와 공동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대성이 무너지면서, 이 세상은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 기독교가 표방해온 고귀한 가치들이 상실하고 말았다.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불신이다. 희망이 아니라 절망이다. 사랑이 아니라 증오이다. 이러한 자본주의적 새로운 세계질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래서 이번호부터 종교개혁 500주년 즈음하여 특별기획의 부제를 손규태 박사의 저서의 제목인 <세계화시대 기독교 두 얼굴>로 잡았다. 이것은 하나님 대신 시장이 자리 잡은 한국교회에, 잃어버린 성서의 경제정의와 가치, 그리고 예언자 전통의 교회개혁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줄 것으로 기대해 본다.

 
기독교, 자본주의 세력의 동반자

자본주의 경쟁의 세계에서는 소수의 승리자와 영웅, 다수의 피해자와 열등한 인간이 서로 충돌하며 살아간다. 이들 사이에서 동반자적인 연대성과 사랑, 그리고 나눔이라는 것을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은 교회 내부도 마찬가지이다. 큰 교회와 작은 교회의 동반자적인 연대성은 물론, 하나님나라운동에 대해서 공동연대성을 인식하지 않는다. 오히려 큰교회가 작은교회를 종속시키려 한다. 작은교회 스스로 종속된다.

자본주의 세계화 과정에서 기독교 신학은 자본주의 부르주아 동반자와 지지자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했다. 유럽의 진보주의 신학과 미국의 사회복음주의 신학은 이러한 세계화의 모순을 발견하고, 새로운 대안을 모색했다. 이것은 구소련의 프롤레타리아혁명이 성공하고, 사회주의 국가들이 등장하면서, 이 두 신학은 방향을 잃고, 노선은 분열되고 그 역할은 상실한다. 그후 아프리카와 남미, 그리고 미국에서 해방신학, 아시아에서 고난당하는 사람들의 신학, 한국에서 민중신학, 사회적 약자인 여성신학자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여성신학은 자본주의 세계의 정치 및 경제체제가 가져오는 모순을 폭로하고, 거기에 저항했다. 이것을 바로 신학화 했다.

이러한 행동하는 신학은 정통주의와 경건주의, 근본주의 신학과 신앙을 고수하는 국내외의 보수적인 신학자들의 벽에 부딪혔으며, 진보적인 신학자간, 실천현장의 활동가들의 분열로 인해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본지 기독교의 선교역사에서 나타난 세계화의 꿈과 자본주의 세계화 의지의 결탁, 정통보수주의 신학의 문제점, 신보수주의 신학과 보수 정치세력과의 야합, 한국교회의 신뢰성 위기 등을 진단하고, 새로운 종교개혁과 새로운 교회의 등장에 대한 희망을 제시할 예정이다.

한국개신교는 1980년도를 정점으로 마이너스 성장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가톨릭 교회는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다. 위기의식을 느낀 한국개신교는 교회성장론을 내세워 여러 가지 형태로 몸부림을 쳤지만, 수평적인 교인이동이라는 결과를 불러 일으켰다. 미국에서 들어온 교회성장론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본주의적이고, 샤머니즘적인 축복만능의 복방망이로 전락시켜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신뢰를 추락시켰다.
이때부터 건실한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기 시작했으며, 이들로 하여금 교회를 불신하게 만들었다. 또한 교회 마다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고, 예수님 몸인 교회당에는 예수님은 없고, 시장경제원리에 따라 부자들이 자리를 채웠다. 가난한 교인들은 자연스럽게 교회를 떠나기 시작했다. 이것이 이웃종교와 다른 모습이다.

선교초기 한국교회는 가난한 이웃을 향한 사회봉사로 교회의 신뢰를 얻었다. 하지만 한국선교 130년이 지난 오늘, 한국교회의 이같은 모습을 거의 찾아보기 힘든 상태이다. 대신 천주교가 이것을 감당하고 있다. 성 프란시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 했을 당시, 그는 부자들을 찾지 않았다. 자식을 바다 속에 수장시키고 슬피우는 세월호 유가족, 노동현장에서 고난당하는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는 장애인 시설, 복음을 위해 순교한 순교자묘역을 찾았다. 한국교회 교인들이 떠나고 있는 사이, 가톨릭 신자는 몇 배로 늘었다.

하나님나라 운동의 이정표

본지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와 기독교 신학이 새롭게 감당해야 할 하나님나라운동의 이정표를 제시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특별기획 12번째의 글을 내 보낸다. 분명한 것은 한국교회가 바르게 갱신하고, 하나님나라운동을 역사의 한복판에서 예수님과 함께 벌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곳은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현장이다. 또한 자본주의적 경제체제와 단절하고, 제국주의적 세계화를 막아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정복과정을 보면, 왜 오늘 한국교회가 자본주의적 경제체제와 단절하고, 제국주의적 세계화를 막아야 하는지는 극명해진다.

영국의 문명 비평가 케크패트릭 세일은 <낙원정복의 정복>에서, “콜럼부스로 시작되는 유럽인들의 세계화는 오늘 로마교황청에서 중국에 이르기까지 세계 곳곳에서 팔리고 있는 코카콜라가 상징하는 의미처럼 서구문명의 정신적 승리요. 심리적 정복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제국주의자들에 의한 세계화를 비판했다.
콜럼버스 이래 가난한 국가의 주민들에게 서구의 언어와 의복, 가치관과 관습까지 유럽 것을 요구한다. 유럽 것이 문화라면 다른 대륙의 것은 민속이고, 유럽의 것이 종교라면 다른 대륙의 것은 미신이며, 유럽의 것이 언어라면 다른 대륙의 건은 방언이고, 유럽의 것이 예술품이면 다른 대륙의 것은 민속품이 되었다. 여기에 기독교가 크게 기여했다.

한국에 처음 들어온 기독교도 마찬가지로 한국족의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현장이 바로 선교현장이었어야 했다. 그런데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권력의 편에서 한민족의 의식화와 독립운동을 철저하게 막았다. 대신 피압박 민족에게 “예수 믿고 천당 가라”고 외쳤다. 그리고 가난하게 살아온 조선의 백성들이 무슨 잘못을 그리 많이 했길래, 이들을 향해 회개하라 외쳤다.

이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정통이 되어버렸으며, 권력과 결탁해서 많은 혜택을 누렸다. 요즘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 구속의 정국에서도, 박근혜 전대통령 감싸기에 급급하고 있다. 한반도의 비핵화를 말하는 인사들을 종북세력, 좌파로 몰아붙인다. 이런 교회가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얻겠다고 한다. 그리고 자기와 다른 것을 무조건 좌파로 몰아붙인다.

그러면서 화해하자고 한다. 용서하자고 한다. 일치하자고 한다. 교인들은 불의한 정권을 규탄하기 위해서 촛불을 드는데, 목사들은 한손에는 태극기, 또 한손에는 성조기를 들고 성직자 가운과 후드를 착용하고, 십자가를 앞세워 계엄령을 선포하라고 한다. 그리고 주일날 설교시간에는 촛불을 든 국민들을 향해 저주를 퍼붓는다. 그리고 촛불을 든 국민들을 향해 북한 김정은의 조종을 받는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또 검증되지 않은 유언비어를 SNS에 퍼 나른다.

세계화,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승리

교회의 이러한 형태는 자본주의적 경제체제와 자유민주주의를 바탕에 두고 일어난 세계화의 바람이 한국교회에 그대로 불어 닥친 결과이다. 세계화를 통한 시장경제는 과연 지구의 평화를 가져다가 주고 있는가. 자유 규제 철폐, 사유화라는 도식으로 미국과 일본, 유럽의 자본주의 국가들은 40여년 전부터 자신들이 만들어낸 국제기구들, 즉 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 세계무역기구의 지원을 받아 남반부의 가난한 나라들에게 시장통합을 강요했다.

세계화를 통한 자본주의적 경제체제의 승리는 사회적 분열과 경제적 불안을 위협적으로 증가시켜 왔다. 승리자와 패배자의 골은 깊어지고, 빈부의 격차는 더욱 심해지고 있다. 계층간의 갈등, 세대간의 갈등, 이념간의 갈등, 경제적 갈등, 사회적 갈등 등은 극에 달했다. 이것은 제19대 대통령선거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모든 성장의 열매는 북반구 인구 20%가 차지하고 나머지 80%는 절대빈곤에 시달리고 있다. 남반부의 가난한 사람들은 매년 5000만명 이상이 영양실조로 죽어가고 있다. 남반부의 민족들은 보다 나은 삶을 찾아 북반구로 밀입국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많은 난민들이 지중해에 수장된다. 여기에는 부모와 함께 고향을 떠난 어린아이들도 상당수 끼어 있다.

이렇게 세계민족이 제1세계의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체제로부터 죽임을 당하고 있는데,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이겠다는 신보수주의를 자처하는 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1세계민족에게만 축복을 주는 하나님이라면, 누구도 하나님을 믿지 않을 것이다. 분명 하나님은 고난당하는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처음 자신의 운동을 시작했다. 예수님도 가난하고, 소외되고, 눌리고, 갇히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함께 역사의 현장에서, 이들과 하나님나라운동을 펼치셨다. 그리고 성서의 경제정의는 예수님이 역사의 현장에서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인 나눔과 섬김이다. 교회개혁은 성서로 돌아가야 한다는 명제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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