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도운동의 문제점을 진단한다(끝)-신사도 운동의 근본 구조와 교리적 이단성


 바울의 가르침은 교회의 기초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교회의 질서 파괴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인들은 승리한 현대 예언자들에게 복종해야 한다.바울 사도가 조이너의 책을 성경과 동일한 수준이라고 인정해 주었다는, 그것을 믿으라는 말인가? 이런 것이 바로 유사한 이단들이 주장하는 가증스러운 속임수이다”


        
 사도바울은 실패자라는 주장 

사도의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걸으면서 점차 자신의 죄악을 인식하게 되었고, 자신의 성숙함도 이에 따라서 깊어져만 갔다. 처음에는 자신에 대해서 흠이 없다고 했었다(빌 3:6). 몇 년 후에는 “사도들 중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고백했다(고전 15:9). 그리고 몇 년 후에는 “성도 중에서 가장 작은 자”(엡3:6)라고 하다가, 나중에는 “곤고한 자”로서 사망의 몸에서 건짐을 기다리는 성도가 되었다(롬7:24). 그리고 몇 년이 지난 후, “죄인 중에 괴수” (딤전1:15)라고 설명하였다. 점차 자신에 대한 용어가 낮아진 것이다. 사도 바울의 이런 표현들은 당시 헬라문화권에서 특히 동방세계에서 매우 보편적으로 사용되던 겸손함의 표현이며, 동시에 약간의 과장법이 들어있는 수사학적인 표현방식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가 드러내고자 하는 요지는 분명히 개인의 생애에 대한 것이다. 그가 점차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면 알수록, 자신에 대해서는 오직 구원해 주시기를 간절히 열망하는 사람으로 변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자신이 현재 처해있는 상태가 죄악 속에 있음을 더 철저하게 인식하면 할수록, 그저 좌절감에 빠져서 허우적거렸던 것이 아니다. 그는 그토록 오랫동안 인내해 주시고, 은총을 베풀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게 되었다. 로마서 7장 14-25절의 경우, 바울 사도의 개인적인 성찰이 들어있으면서도,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죄에 대항해서 싸워나가는 것과 관련이 있지만, 그보다는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아와 성령의 능력을 제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조이너는 이런 구절들을 전혀 문맥과 상관없이 인용해서 그가 실패하게 된 것은 교만함이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조이너는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에 대해서 증거하고 말하는 여러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사도 바울이 자신의 회심 이전을 의미하는 단어들을 가지고 마치 그가 사도가 된 이후에도 오만한 자로 사역하다가 실패했다고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의 가르침 교회기초 아니다


 조이너의 주장은 갈수록 태산이다. 조이너는 바울이 자신에게 말하기를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약성경에 담긴 사도바울의 편지들을 잘못 왜곡하고 있다.’했으며, 또한 ‘마치 자신의 가르침이 교회의 교리적 기초가 되는 것처럼 잘못 사용하고 있다.’고도 했다는 궤변을 근거로 해서 오직 복음서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에 나오는 것들만이 교리적 기초가 되는 것이라고 조이너는 주장한다. 복음서들은 직접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것이다. 얼핏 들으면, 조이너의 주장이 맞은 것처럼 보이지만, 구속계시의 통일성과 일체성, 점진성과 연계성을 완전히 부정하는 말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과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기에, 사도 바울의 개인적인 편지만으로 격하시킬 수 없는 것이다. 주님께서 명령하신 바와 전혀 차이가 없다.


 사도 바울이 조이너에게 말하기를 ‘그저 이미 성경에 담겨 있는 옛날 서신들에 대해서 확증하는 것에만 그치지 말고, 더 많은 것을 저술하라.’고 말 했다고 한다. 특히 ‘자신(조이너)의 저술과 신약성경은 수준이 동일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성경 이외에도 말해 준 것이 많다는 것이다. 과연 바울 사도가 조이너의 책을 성경과 동일한 수준이라고 인정해 주었다는 그것을 믿으라는 말인가? 이런 것이 바로 유사한 이단들이 주장하는 가증스러운 속임수이다. 현대에 예언적 계시들이 필요한가에 대해서 열렬히 옹호하고 있다. 어떤 구체적인 사건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는 것과 성경에 나오는 교리를 더 밝혀주기 위해서 더 많은 저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목적에서라면 새로운 계시를 그때마다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연구하고, 기존에 주신 말씀을 연구해온 신학자들의 도움을 받아서 더 체계적으로 신학을 연구했어야만 한다. 


  조이너의 책에 나오는 소위예언들이 위에 나오는 두 가지 목적을 위해서 주어졌다고 보기 어려운 것은 성경과 배치되는 것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은 교리들을 자기에게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에 나와 있지 않은 것들을 말한다고 하면서도, 성경과 대립적인 것들을 흥미위주로 나열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은 다음 몇 가지 사실로 분명해 진다.

  조이너의 ‘마지막 탐색’

 ‘하늘나라에는 구별이 되는 등급이 매겨져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섬긴 자들과 바른 동기를 가지고 믿었던 자들은 예수님의 보좌에서 가장 가까운 지역에 들어간다.’고 했다. 그들은 덜 헌신한 기독교인들 보다는 덜 영광스러운 몸을 갖는 다고 하였다. 그리스도를 섬기지 않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보좌와 임재가 있는 천국의 “바깥 어두운데” 배당되어서 영원토록 있게 되는데, 그들이 회개할 때가지 머물게 한다는 것이다. 그 후에 천국의 가장 낮은 차원에 들어가도록 허락을 받는다고 하였다. 성경에 보면, 훗날 천국에 가서 각각 상급이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데, 천국에 들어가는 곳에 각각 차등이 주어져 있다거나, 각각 서로 다른 영광의 부활을 입게 된다는 것은 전혀 언급이 없다. 어떤 사람은 지옥과 같은 곳에서 머물다가 다시 들어간다는 것도 전혀 나와 있지 않다. 반대로 성경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리스도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게 될 것이며, 영원한 기쁨을 누리는 장소에 있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천국에서는 더 이상 눈물이나 애곡하는 것이 없을 것인데 이는 예수님이 우리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어주실 것이라고 되어 있다 (계 21:4).     


 조이너는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인들이 최후 싸움에서 승리를 한 현대 예언자들에게 복종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의존하듯이 선지자들에게 의존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현대 예언자들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언급이나 암시조차도 없다. 갈라디아서 4:17절에 오히려 거짓 선지자들과 교사들을 경계하라고 갈라디아 지역 성도들에게 경고하였다. 


 조이너는 그리스도인들이 천사들과 상호교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나 그의 이런 주장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로마 가톨릭에서도 이렇게 주장하기 때문에 오랫동안 논쟁이 되어온 바이다. 성경 그 어느 곳에서도 수호천사에 관련된 증거들을 찾을 수 없다고 요한 칼빈은 설명한 바 있다. 조이너는 천국에서도 결혼 생활이 계속 유지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천국에서는 시집가지도 않고 장가를 가는 일도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의 이런 해괴한 주장은 마태복음 22:29-30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이상한 교리들을 조심하라.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지도자 디모데에게 당부하기를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딤전 1:3-4)고 하였다. 에베소에는 각종 신화에 나오는 인물들을 섬기는 전각들이 거대하게 세워져 있었다. 이런 동일한 경계심은 지금도 신사도 가르침과 조이너의 교리들에게도 해당한다.  특히, 이들은 시편 105편 15절을 인용하면서 사도들의 권위를 강조한다. “나의 기름 부은 자를 손대지 말며 나의 선지자들을 해하지 말라”는 말씀대로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즉각적으로 진노하신다고 엄포를 놓는다. 선지자들의 행동이나 가르침에 대해서 도전하거나 비난하는 자들도 포함된다고 확대시킨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강조하니, 사람들이 아예 정당성 여부에 대해서 검증하는 말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구절은 본문의 전체 문맥에서 이해해야만 하고, 이처럼 선지자와 예언가들에게 순종해야한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본문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이 구절의 전체적인 뜻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아브라함의 생애를 교훈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무참히 짓밟는 탄압 자들, 이방인 권세 자들에 대해서 하신 말씀이다. 시편 105편 15절에 나와 있듯이,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은 이스라엘의 영적인 지도자들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전부를 의미한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 백성들이기에, 그들이 육체적으로 압박을 당하는 경우에 결코 대적 자들에 대해서 그냥 좌시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처럼 얼토당토 않는 성경인용을 해 가면서 선지자들의 직무를 대행하는 자신들의 위세를 높이고 있으니 한심하기 그지없다. 


  오늘날 교회의 지도자들이 이 구절을 잘못 인용하는 경우도 있는데, 결코 목사나, 강도사나, 강단에서 설교하는 사람들이나, 치리를 맡은 장로들이라 하더라도 아무런 제재 없이 무소불위의 권세를 휘두르는 것은 성경의 정신에 맞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가르침이 성경에 합당한지를 여실히 평가해 보아야만 하는 것이다. 성경을 왜곡하는 무지함과 권위의식에 사로잡혀 있어서 얼마든지 기독교 신앙은 왜곡될 수 있다. (끝)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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