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세계화는, 아니 오늘 세계화시대의 기독교는 자본과 맘몬에 무제약적으로 자유를 허락하면서, 인간은 자유를 상실했다. 자본의 노예가 되어 버렸다.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 돈이 신이 되어버렸다. 콜럼버스의 세계화 꿈은 500년이 지난 오늘, 하나님이 승리하신 것이 아니라 맘몬이 승리한 것이다. 독일 잡지 <슈피켈>의 기자는 오늘의 현실을 일목묘연하게 평가하고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 대신 시장이 등장했다. 이 신의 현현은 다우존스 주가지수이고, 그의 성체는 달러이며, 그의 성찬은 환율 조정이고, 그의 나라는 지금 크렘린의 지도자들까지도 찬양하는 자본주의 보편 문명이다”

<슈피켈> 기자의 말처럼 서방의 국가들은 세계자본의 왜곡된 흐름과 제1세계 재무장관 회의에서 만들어진 국제통화기금은 서구 국가들에게 3배에 가까운 경제성장을 가져다가 주었다. 세계화된 오늘의 현실에서 국가가 자본을 통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그것은 자본이 국가 통제에서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본이 국가를 통제하는 상태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기독교신학은 초대교회에서 그리스 철학,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의지해서 만들어졌다. 이는 곧 그리스도론과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왜곡했다. 그것은 중세 로마의 법체제와 봉건 체제에 의지해 성직자 중심의 자기 완결적 권력체제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또한 근대 기독교, 계몽주의 신학은 종교개혁의 복음과 본질인 그리스도인 자유를 왜곡케 했다. 당시 강력하게 등장한 시민계층의 자유, 즉 자본주의적 시장의 자유와 혼돈했다.

1520년 마틴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란 짧은 글에서, “그리스도인은 만물에 대해서 자유로운 주인이며,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만물을 섬기는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된다”고 했다. 루터의 이 말은 주인이 존재하는 곳에서 다른 사람은 필연적으로 종이 된다는 의미의 말이 아니다. 한사람의 그리스도인은 주인이면서, 동시에 종이라는 말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죄인이면서 동시에 의인이다’로 도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것은 내적 인간의 자유를 설명한다. 또 외적 인간의 자유도 설명한다. 루터의 자유개념은 이원론적으로 이해한다. 이렇게 수용되는 과정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사회적, 정치적 지평을 상실한다. 루터는 영의 자유에서 시작함으로써 자유를 개인의 질적 내면성으로 제한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모든 세속적 권위와 대립되는 초월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존재가 내적인 경건만을 강조되었다는 것이다. 사회학자 마르쿠제는 이러한 루터의 주장을 비판한다.

“루터의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에는 부르주아적 자유 개념을 구성하고 특별히 부르주아적 권위 형성의 기초가 되는 모든 요소들이 최초로 총집합되어 있다. 그것을 다시 말하자면 자유를 개인의 내면세계에만 돌리고, 동시에 외적 인간을 세속의 정권에 굴복시키는 것. 이러한 세속적 권력들의 체제를 내적 자율성과 이성을 통해서 초월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 ‘이중 도덕’으로 인격과 사업(직무)을 갈라놓는 것. 실제로 존재하는 부자유와 불평등을 ‘내적 자유 행동’의 결과로 정당화하는 것 등이다”

보수적인 루터교의 신학자들은 마르쿠제가 언급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영적 인간 혹은 내적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으로 생각했다. 외적인간은 세상의 권위나 체제에 ‘복종하는 인간’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현실의 부자유와 불평등은 내적자유와 평등을 통해서 자족하거나, 종말론적으로 밀쳐버렸다.

교인들에게 영적, 내적 자유만 강조

오늘 한국교회를 보면 그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즉 오늘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내적인간, 영적인간만이 누리는 것으로 생각하며, 교인들에게 영혼구원의 내적 변화만을 강조한다. 한마디로 오늘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유를 외적인 것은 철저하게 밀쳐버린다. 외적인 자유, 사회 구원을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배격하며, 정치적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권력의 주변을 맴돌며, 온갖 혜택을 누려왔다.

이렇게 한국교회는 루터파 신학자들처럼 종교를 개인적인 사안으로 규정하고 순수하게 내적인 것으로 인정함에 따라 종교의 자유를 얻고, 그 결과 그리스도를 세상에서 사실상 무해하고 무의미한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교인들의 사회참여에 대해서 철저하게 막는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정작 보수단체의 집회에 참석, 불의한 정권을 옹호하는 등 정치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세상의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세상 속에서, 이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다. 구성성서의 흐름인 출애굽 사건,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압제 밑에서 신음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아우성소리를 들으시고, 이들을 향한 구원의 역사를 행하셨다. 그런데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성서의 중심사상을 부정하며, 영미선교사들이 전파한 식민지적이고, 정통주의적이며, 경건주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신학과 신앙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그것은 분명 보수신앙의 가치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당을 자유주의 시장경제체제의 원리인 맘몬(시장)에 내어주었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은 이렇게 이중성을 보여 왔다.

그리스도인은 만물에 대해서 자유로운 주인이다. 동시에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만물을 섬기는 종이다. 모든 사람에게 예속된다. 루터의 이러한 명제는 후배들에 의해서 “그리스도인은 영적 삶에서 자유로운 주인이며,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세속적 삶에서 만물을 섬기는 종이며, 누구에게도 예속된다”로 변질됐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개신교의 잘못된 이해와 해석은 구자유주의라고 불리는 부르주아 사회를 거쳐 오늘날 신자유주의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한 전인류는 맘몬에 길들여지게 하고, 그 아래 무릎을 꿇게 만들었다. 오늘 한국교회를 보라, 어디에서도 교회다운 교회를 볼 수 없다. 역사신학자 백낙준 목사는 오늘 한국에서의 교회다운 교회는 농촌교회이며, 목사다운 목사는 농촌교회를 섬기는 목사라고 했다. 오늘 농촌교회다운, 농촌교회를 섬기는 목사다운 목사가 있는가.

모두가 맘몬과 바벨을 쉬지 않고 노래한 나머지 이웃교회의 목사는 더 이상 동역자가 아니다. 넘어야 할 경쟁의 대상이다. 그래서 교인들을 놓고서 쟁탈전을 벌이다. 대형교회는 구멍가게와 같은 작은 교회의 교인들을 빼앗아 떠난 빈자리를 채운다. 십자가탑은 경쟁적으로 높인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십자가 첨탑은, 더 이상 세상 사람들의 빛이 아니다. 소금 맛도 잃어버렸다.

곳곳마다 수십억, 아니 수백억, 수천억을 삼켜버린 바벨탑이 세워져 있다. 이 곳에 일하시는 하나님을 가두어버렸다. 예수님도 가두었다. 한마디로 예수님을 성전 예수님, 하나님을 성전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러면서도 교회가 세상을 향해 열려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닫혀 있는 교회마다 세계 선교, 북한선교를 말한다. 북한과 세계에 한국의 교파주의 그대로 이식시키겠다는 것이 아닌가. 북한선교에 있어서도, 자신들은 노력도 않고 통일된 이후 북한의 교회를 재건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예수님은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에서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이셨는데, 우리는 그 고통의 현장에 들어가지 못하는가. 우리의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현장은 남과 북이 대치한 분단의 현장이 아닌가. 그곳에서 평화적인 민족통일을 노래해야 하지 않는가. 한국교회에 주어진 하나님나라운동의 명제가 분명함에도 오늘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반통일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데 교인들은 서글퍼하고 있다. 이런 사이 정치인들은 남북분단을 정치적으로 철저하게 이용하지 않는가. 교회의 목사들은 그 주변을 얼쩡거리며, 자신의 이익을 철저하게 챙기지 않는가.

그것이 오늘 보수적인 한국교회가 말하는 영적자유이며, 내적자유이다. 그리고 정교분리이다. 정교분리를 내세워 일본제국주의에 적극 협력했던 기독교가 바로 보수라는 이름을 내세워 남북분단을 고착화시키고 있지 않는가. 미국의 전쟁 위협에 박수를 치는 것이 기독교의 가치라고 말하는 목회자들에게 무슨 희망을 걸겠는가. 전쟁이 일어나 100만명이 죽어도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이 목회자 아닌가. 종교개혁자 루터가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순전히 영적, 내적 자유가 아니다. 삶의 영역을 모두 포괄하는 자유이다.

 
삶의 영역을 포괄하는 자유

선교초기부터 1970년대까지 교회는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의 이웃이며, 사회 정의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의 집단으로 인식되어 왔다. 교회는, 개화기에는 개화의 등불로서, 일본식민지 시대에는 나라의 독립과 자주를 위한 투쟁의 장소로서, 한국전쟁과 그 이후에는 전쟁 피해자를 지원하는 교회로서, 이승만 이후 군사독재정권 아래서는 민주주의와 인권, 사회정의의 실현을 위한 투쟁의 장으로서 인식되어 왔다. 당시 고난당하던 도시빈민을 비롯한 노동자들은 박해를 당하면 제일먼저 종로5가 기독교회관을 찾아 피난처를 구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이런 교회가 1980년 중반 이후 스스로 게토화 되었다. 그리고 일반인들에게는 “멀쩡하지 않은 사람들의 집단”으로까지 비쳐지기 시작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고난당하는 노동자와 빈민들이 개신교회를 찾아 온 일은 없다. 거의 명동성당과 조계사를 찾았다. 한국개신교는 이들 노동자를 향해 ‘폭도’라고 매도했다. 더 이상 이 땅에서 고난당하는 사람들은 개신교는 물론, 천주교, 불교 등 종교를 찾지 않는다. 그것은 믿을 수 없는 종교집단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정부에서가 종교단체를, 특히 기독교를 우습게보기 때문에 찾아가야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의식이 고난당하는 이웃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렸다.

이런 사이 이단사이비 집단들이 허황된 복음을 가지고, 사람들의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방해하고 있다. 이들은 극단에 가서는 비정상적인 일들을 저지른다. 그리고 이단사이비연구가들은 자신의 생각과 다르면 무조건 이단사이비로 정죄한다. 100가지 중 99가지는 같고, 한 가지만 틀려도 이단으로 규정한다. 교단마다, 아니 단체마다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를 만들어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한다. 한마디로 교회가 세상과의 담을 높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다 목사들은 교인들을 사회에 대해서 무지몽매한 인간으로 만들고 있다. 그것도 건전하고 상식적이며 성숙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형태들에서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민족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삶을 터부시하면서, 교인들의 사회성은 땅에 떨어졌고, 세상 속에서 교회의 자리는 계속해서 잃어가고 있다. 대신 목사들의 입에서는 서구교회와 미국교회가 실패한 사업자본주의에 편승된 ‘교회성장론’을 들고 나와 떠난 교인들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한 교인쟁탈전을 벌인다. 그리고 교회를 성장시키지 못한 작은 교회 목사들을 향해 능력이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 보니 교회는 윤리적, 도덕적 가치를 상실한 적당주의적 사고방식이 교회에 뿌리를 내렸고, 자신의 목표달성을 위해서 자본주의적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만담과 코메디화 된 설교는 복음의 본질을 왜곡시키고 있다. 여기에다 목사들은 이웃 교회의 교인을 끌어들이는 것을 선교의 성공인양 생각하는 종교인답지 못한 뻔뻔한 인간들로 변질되어가고 있다. 이것은 모두가 상업자본주의에 길들여진 교회의 모습이며, 여기에서 이탈된 목사들은 아무런 존경도, 영광도, 지위도 얻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한국교회의 현실이며,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은 한국교회가 변화되어야 할 것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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