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 헌 철 목사

경복궁은 조선왕조와 함께 탄생한 궁궐이다. 그래서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큰 궁궐이다. 그런데도 오백년 내내 찬밥 대우를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바로 태종 이방원한테 있었다. 경복궁 홀대의 역사가 이방원으로부터 시작됐던 것이다. 경복궁이 완공된 지 3년 뒤인 1398년. 이때까지도 경복궁은 법궁 역할을 잘하고 있다. 그런데 이 해에 이방원이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 이성계를 몰아내고 이복동생 이방석과 실권자 정도전을 죽였다. 이것이 제1차 왕자의 난이다. 실권을 잡은 이방원은 둘째형(당시엔 장남) 이방과를 왕으로 추대했다. 훗날 정종이란 타이틀을 갖게 된 이방과는 1399년에 자신의 거처를 한양에서 개경으로 옮겼다. 사실상의 개경 천도를 단행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경복궁은 불과 몇 년 만에 법궁의 지위를 잃게 되었다.

이방원이 경복궁을 거부한 의도는 다른 데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조선 건국의 설계자인 정도전에게 열등감 비슷한 경쟁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조선 건국 직전에는 정몽주를 죽이고, 건국 뒤에는 정도전을 죽였다. 그는 나중에 정몽주는 높여주면서도 정도전에 대해서는 끝내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만큼 정도전에 대해서만큼은 심사가 뒤틀려 있었다.

그런 이방원의 입장에서 볼 때, 경복궁은 정도전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곳이었다. 왜냐하면, 경복궁이 정도전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정도전은 경복궁을 만드는 과정은 물론이고 경복궁 내 곳곳에 명칭을 붙이는 과정에까지 개입했다. 태조 4년 10월 7일자(1395년 11월 19일자) <태조실록>에는 정도전이 각각의 건물에 대해 왜 그런 명칭을 붙였는지를 설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이방원은 경복궁이 싫었다. 아버지 생각이 나서 괴로운 곳이었고, 정도전 생각이 나서 역겨운 곳이었다. 그래서 이방원이 새롭게 건설한 궁궐이 경복궁 동편의 창덕궁이다. 비원으로도 유명한 창덕궁은 그런 배경에서 생겨났다. 경복궁에 대한 이방원의 트라우마 때문에 생긴 궁이었던 것이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경복궁이 꺼림칙해서 이방원이 창덕궁 공사에 착수했다 해도, 개경에서 한양으로 재천도한 직후에는 경복궁에 기거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한양으로 재천도한 1405년만 해도 한양에는 궁궐이 경복궁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방원은 경복궁에 가는 게 싫었다. 그래서 창덕궁이 완공되기 전까지 신하의 집에 기거했다. 한때는 정도전의 편이었다가 나중에 자기편이 된 조준의 집에 머물렀다. 경복궁에 대한 이방원의 기피 의식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방원한테 경복궁은 악몽 같은 곳이었다. 가족에 대한 패륜을 떠올리게 하고 정도전에 대한 열등감을 떠올리게 하는 곳이었다. [출처 :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대한민국의 제19대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은 아직은 청와대에서 집무를 보고 있지만 “청와대를 국민에게 돌려주겠다.”며 광화문 시대를 열겠다는 공약의 실천의지를 보여 주고 있다. 물론 이방원과 같은 트라우마 때문에 광화문 시대를 열겠다고 한 것은 아니다. 단지 그동안 청와대에서 행하여진 일들이 대한국인들에게 한, 억울함, 슬픔, 고통, 번민, 등을 해소해 주는데 효과적이지 못하였다는데서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함으로, 대한민국 국민의 행복추구권을 보장해 주는데 효과적인 소통문화의 일환에 무게의 중심을 두고 광화문시대를 열겠다는 것은 아닐까? 따라서 대통령 집무실이 광화문에 자리 하느냐 하지 않느냐하는 것보다 앞서 선행되어야 할 것은 마음중심으로부터 국민의 행복추구권과 자존감을 갖도록 함은 물론, 앞으로는 억울한 국민이 없도록 하겠다는 결단과 열망이 있어야 한다.

억울케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신27:19).

한국장로교신학 학장•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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