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은함에 대하여

은은하다는 말 속에는 아련한 향기가 스미어 있다
은은하다는 말 속에는 살구꽃 위에 내린
맑고 환한 빛이 들어 있다
강물도 저녁햇살을 안고 천천히 내려갈 땐
은은하게 몸을 움직인다
달빛도 벌레를 재워주는 나뭇잎 위를 건너갈 땐
은은한 걸음으로 간다
은은한 것들 아래서는 짐승도 순한 얼굴로 돌아온다
봄에 피는 꽃 중에는 은은한 꽃들이 많다
은은함이 강물이 되어 흘러가는 꽃길을 따라
우리의 남은 생도 그런 빛깔로 흘러갈 수 있다면
사랑하는 이의 손 잡고 은은하게 물들어갈 수 있다면

▲ 문 현 미 시인
사람이 하는 말은 온도를 지니고 있다. 차가운 말, 미지근한 말, 따뜻한 말, 뜨거운 말 등등. 시의 제목에 들어 있는 ‘은은함’이란 말의 온도는 몇 도쯤일까. 정확한 수치로 나타낼 수는 없지만 적어도 따뜻한 가슴을 지닌 사람에게서 나오는 말일 것이다. 영상의 말일 것이고 비등의 말은 아니고 그렇다고 영하에 속한 말은 더욱 아니다.

요즘 세상의 온도는 참 뜨거운 편이다. 정치, 안보, 경제 등 각종 분야에 대한 말의 열기가 대단하다. 은은한 자세를 취하다가는 토론에서 밀려나기가 쉽다. 모두가 뜨거운 폭탄을 손에 쥐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들기도 한다. 이런 시대 조류와는 상관없이 어쩌면 시대 조류에 역행하는 말이 ‘은은하다’일 것이다. 무엇이든지 빠르게 진행해야 하는 풍토에 익숙해지다 보니 느리게 사는 것을 잊고 사는 경향이 있다.

은은하다와 느리다는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시인은 시의 첫 행 “은은하다는 말 속에는 아련한 향기가 스미어 있다”는 표현을 함으로써 은은하다에 대한 함의를 전하고 있으며 시의 마지막 행에 이르기까지 은은하다에 대하여 구체적인 표현을 이어 간다. 저녁 햇살을 안고 천천히 내려가는 강물과 벌레를 재워주는 나뭇잎 위를 건너가는 달빛 모두 은은하게 움직인다고 한다. 따라서 “은은한 것들 아래서는 짐승도 순한 얼굴로 돌아”올 만큼 은은함의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은은하게 강조한다.

시에서 ‘은은하다’라는 시어가 계속 반복되고 있는데도 시적 긴장이 유지되고 있다. 그것은 언어를 다루는 탁월한 솜씨로 인하여 자연스러운 리듬이 발생하고 그로 인하여 독자는 저절로 시에 동화되어 가기 때문이다. 비록 새로운 이미지, 독특한 주제, 참신한 비유 등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은은한 시가 주는 감동이 있다. 이 시의 제목이 “은은함에 대하여”이듯이 시의 전개도 은은하게 펼쳐지고 있다.

은은함은 직설적이거나 독특한 것 또는 튀는 것과 대립된다. 강한 향기를 지닌 꽃보다는 은은한 향기가 나는 꽃 앞에 더 오래 머무르게 된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겸손한 사람에게는 은은한 향기가 배어 있다. 속도의 세상에서 우리 서로 “은은하게 물들어 갈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백석대학교 교수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