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 성 택 목사

‘대화와 압박’, 속칭 ‘당근과 채찍’이라는 표현들을 최근에는 어렵지 않게 언론매체에서, 지인간 대화에서 가장 많이 듣고 산다. 다름아닌 대북정책에 관하여 트럼프 정부를 위시해서 소위 대북압박 공조에 나선 국제사회의 공통된 키워드가 되었다는 말이다. 이 말의 뜻의 쉬운 풀이는 “말을 안들을면 그 대가로 힘으로 때리겠다.”는 것이고, “말을 잘 들으면 그 대가로 맘에 드는 선물을 주겠다.”는 식의 논리를 말하는 것이다. 좀 험하게 말하면 깡패논리다. 어차피 국제사회나 우리 사회나 힘의 논리가 작동하고, 강자가 주도하는 것이야 ‘질서’를 명분삼은 세계에서야 공통된 인식이라서, 굳이 이것을 깡패논리라고 하는 필자를 비난하는 것에 맞설 생각은 없다. 사드문제에서 중국의 대응도 이것이었다. 롯데가 무슨 죄가 있어 중국 인민으로부터 그토록 무참한 비난과 불이익을 받아야 했는가? 말 못하는 롯데는 그저 양국 정부를 쳐다보며 처분만을 기다리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일본의 일본군 위안부 문제도 같은 논리다. 10억엔을 줄테니 입을 다물든지, 아니면 국물도 없다는 식의 소위 양자합의는 오히려 채찍을 택한 당사자 어르신들의 분노만을 자아내었다.

필자는 국제사회의 대북한 ‘당근과 채찍’의 깡패논리를 당장 철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차라리 때리려면 죽도록 때려 항복을 받아내든지, 아니면 끝까지 체제를 보장해주고 핵포기와 더불어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개방 개혁하도록 양자택일의 원리가 작동해야 한다. 왜냐하면 깡패는 깡패논리를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맞는 깡패는 때리는 깡패가 언제 즈음 그만 때릴지를 알고 있고, 어떻게 해야 더 이상 안 때릴지를 알고 있다. 어디까지 맞아 주어야 하고, 뭘 주어야 그만 때릴지, 그때 역으로 무엇을 얻어내야 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지금 북한을 때리고 있는 국제공조세력들은 이 깡패논리를 협상술로 알고 있다. 상대는 때리고 얻어맞는데 전문인 깡패인데, 때리는 쪽은 깡패논리로 때리고는 있는데 언제까지 때려야 하는 지, 얼마나 세게 어디를 때려야 하는지도 모르는 신사들이다. 필자가 보아도 답답하다. 한참을 때리다가 맞고 있는 북한이 반응이 없자, 트럼프는 적당한 때에 스마트 가이 김정은을 만날 수 있단다. 필자는 어설픈 트럼프의 북한 때리기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맞고 있는 북한이 여유롭게 웃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보란 듯이 ICBM급 미사일을 중국 잔치집 앞마당에 그것도 시진핑 면전에서 쏘아 올렸다. 미국과 손잡은 동맹 중국의 배신에 대한 분노의 표현일 것이다. 더욱이 친북이라는 소리까지 들어가며 그래도 북한과 대화를 통해 문제를 풀어보겠다는 문재인대통령 면전에 그것도 취임 3일 만에 냅다 쏘아 보냈다. 새 정부의 대화의지 뭐 그런 것에는 별 관심없다는 말일 것이다. 아예 미본토를 공격할 수 있다는 엄포까지 놓으며, 국제사회를 향해 때릴 테면 더 때려보라는, 자신들의 멧집은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는 속칭 ‘곤조’를 부리고 있다.

이래도 새 정부는 ‘당근과 채찍’ 정책이 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지난번에도 말했듯이 이미 햇볕정책의 승자는 나그네, 곧 이 정책이 태양과 바람의 싸움이라는 싸움의 본질을 알고 있는 김정은으로 이미 결정되어 있는 정책이다. 그런데 아직도 새정부가 이런 싸움을 여전히 계속하려고 한다면 이는 동양의 깡패논리를 전혀 모르는 서양의 신사들이 동양의 대표적인 깡패를 힘으로 두들겨 보지만 끄떡도 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당황하는 현실과 다를 바 없다. 만일 과거 10년과 같은 햇볓정책이면 그 결과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필자의 우려를 간과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지금은 확고한 의지와 신념을 가지고 한 방향으로만 가야 한다. 그것이 어느 방향인지는 필자도 모르겠고 알아봐야 정책에 반영될 여지가 없을 것이니, 제발 대북 정책담당자들은 지혜와 힘을 모아 방향을 정하고, 그 길로 국제사회를 설득하고 공조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경험은 절대로 북한은 설득의 대상이 아님이 분명한 바, 어느 방향이든 북한을 개방시킬 수 있는 길을 찾아야만 전쟁없는 통일과 평화를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음을 명심해 줄 것을 당부하고 당부하는 바이다.

그리스도대학 전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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