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 보수적인 개신교와 정치적 결합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선거 기간 동안 보수가치와 진짜보수 간의 보수논쟁이 그 어느 때 보다도 뜨겁게 달아올랐다. 보수란 한마디로 전통적인 것에 대한 불변의 충성을 말한다. 또한 현존하는 가치를 전적으로 수호하겠다는 신념, 혹은 자세를 말한다. 오늘날 정치가들이 말하는 보수의 가치는 지금까지의 정치체제 혹은 경제 및 사회제도를 그대로 보존하고,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의 정치세계 혹은 경제체제는 자유민주주의 및 시장경제원리에 근거한 자본주의를 말하는 것이다. 이들은 또 자유민주주의야 말로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라고 말하며, 서구 유럽의 자본주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적 시장경제’와 같은 것을 거부한다. 보수주의자들의 이러한 자세는 해방이후 지금까지 남북대결이라는 비정상적인 관계에서도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

한국 정통보수주의자들이 지키고자 하는 보수의 가치는 ‘시장경제체제에 근거한 자본주의’이다. 이들이 추구했던 자유민주주의는 이승만 정권을 시작으로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에 이르기까지 불의한 정권을 정당화 해 주었다. 이 불의한 정권과 함께했던 정당은, 불의한 정권의 몰락과 함께 수명을 다했으며, 불의한 정권의 말로는 한마디로 비참했다. 이승만 독재정권을 비롯한 박정희 군사독재정권,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박근혜 불의한 정권 등을 보면 그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것은 “신 대신 돈, 신의 현현은 다우존스의 주가지수, 그의 성체는 미국의 달러, 그의 미사는 환율조정, 그의 나라는 자본주의의 보편문명”으로 만들어 버린 보수적인 한국교회도 만찬가지이다.

이들이 지키고자 했던 경제체제는 청산되지 못한 식민지 잔재와 외세 의존적 산업구조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런 구조 속에서 혜택과 특권을 누리는 소수 재벌들에 의해서 독과점 되었으며, 이는 곧 사회적 불균형, 정경유착, 기업 외적 부정과 부패에 의한 비정상적인 성장을 만들어 냈다.

또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운동을 탄압하여 부의 정상적인 분배를 차단하고, 자본 및 금융시장의 독점을 통하여 비정상적인 성장을 이루는 결과를 만들어 냈다. 이를 바꾸어 보겠다고 나선 이가 바로 현 정부이다. 취임 15일 동안 많은 일을 했다. 자유시장경제체제에서 눈물을 흐리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눈물을 닦아주었으며, 세월호유가족들의 눈물도 닦아주었다. 기득권세력들에 대한 개혁도 이어갔다. 또한 분열과 갈등으로 얼룩진 국민통합과 정당간의 협치 등을 통해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권력의 하수인 역할 충실히 감당

문제는 보수적인 한국교회가 오늘의 정치현실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그것은 이번 대통령선거에서 그대로 보여주었다. 최태민-최순실 국정농단 과정서 보수적인 한국교회가 보여준 행동은, 한국교회사에서도 그대로 관통하고 있다. 이것은 미국의 보수적인 선교사들에 의해서 한국선교가 시작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미국 장로교 해외선교부 총무 아서 브라운 박사는 자신의 저서 <극동의 지배>에서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100년 전 그들의 조상이 스코틀랜드에서나 지키던 신앙 이론과 실천을 한국의 개신교인들에게 요구했다. 당시 미국에서도 요구하지 않던 보수의 신앙과 실천을 한국의 개신교인들에게 강요한 것이다. 따라서 한국교회의 보수주의의 목표는 세상을 멀리하고 영혼구원을 얻어서 하나님나라에서 영생 복락을 누리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보수주의적 신앙 형태가 한국 개신교의 기초를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비판했다.

사실 한국교회는 일본제국주의 아래서 ‘정교분리원칙’에 따라서 행동해야 했다. 한국개신교는 보수적인 신앙선교와 정교분리원칙에 따라서 교인들에게 ‘영혼구원’만 가르쳐야 했다. 보수신앙과 제국주의 신학, 지배자의 이데올로기적인 신학을 그대로 전해준 선교사들과는 달리, 한국교회의 깨어난 지식인들은 만민공동회의나, 신민회와 같은 단체를 통해서 민족문제에 가담, 교회를 통해서 민족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을 모색했다.

그러나 이러한 애국적인 독립운동과 민족운동은 보수적인 선교사들에게는 교회의 정치화로 낙인찍혔다. 또한 선교정책과 배치되는 것으로 거부당했다. 당시 장로교 공의회는 교회의 정치참여를 금지하는 결의를 하는가 하면, 1907년 부흥운동을 통해 민족적 기독교를 ‘순수한’ 기독교로 전환시키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

이 운동은 한국교회의 탈정치화, 보수화의 기초를 형성하는데 결정적이었으며, 이러한 보수성은 1920년대 사회주의 운동과 대결하면서 깊숙이 내면화-체질화되었다. 해방까지 한국개신교회는 거의 완전하리만큼, 이들 보수주의의 보루가 되었으며, 일본 식민지세력의 충실한 충견이었다. 한마디로 한국개신교는 일본국가주의에 쉽게 굴복, 하나님을 배신하는 ‘배교행위’인 신사참배를 결의하는 등 반민족적이며, 반신앙적인 모습을 그대로 드러냈다. 여기에 익숙해진 한국개신교의 목회자들은, 제19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가짜뉴스를 퍼 나르기에 바빴다. 그것은 선거가 끝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한마디로 보수적인 한국개신교는 해방 후 지금까지 정치적인 보수주의와 그 궤를 같이하면서 충성스러운 동맹세력이 되었다. 이렇게 한국교회는 보수주의적 정치체제를 지원하고, 이들로부터 도움을 받는데 별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한마디로 정교분리정책이 철저하게 악용되었다.

‘정교분리’ 악용되어서는 안된다

정교분리를 처음 주창한 인물은 존 로크이다. 존 로크는 <관용에 관한 편지에서>에서 “종교적 관용을 참 교회의 가장 중요하고 특정적인 표식으로 간주한다”라고 쓰고 있다. 그러나 그는 “국가 또한 관용의 자세를 게을리 하면, 참평화가 깨지고 전쟁이 일어난다”고 보았다. 무엇보다도 존 로크는 “국가가 종교적인 사인에 대해서 간섭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국가는 종교적 사안에 대해서 관용의 자세를 가져야 하며, 시민적 법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에 대해서만 최소한으로 관여해야 한다”고 했다.

반면 홉즈는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것에서 최상의 것을 찾으려고 했다. 홉즈는 “교파간의 갈등을 극복하고 종교 간의 싸움을 막기 위해서는 국가가 개입, 분열과 다툼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국가교회를 철저하게 주창했다. 홉즈와 존 로크의 학설은 오늘 보수적인 한국개신교가 말하고 있는 정교분리와 국가교회와는 사뭇 다르다.

1960년대 이승만 독재정권에 항거하여 민주주의의 회복을 외쳤던 학생과 지식인들은 예외 없이 자유민주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당시 진보적인 인사들로 분류되었다. 이들은 민주주의 기본질서 회복이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민주주의는 박정희 군사정권에 의해서 붕괴 되고, 군사독재정권권이 지속되는 동안에도 지식인과 학생들은 민주회복을 투쟁구호로 사용됐다. 일부 학생운동 단체들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회의를 가지기도 했다. 하지만 대다수 국민들은 군사독재권에 ‘민주주의 질서 확립’을 내세워 군사독재정권에 대항했다.

그러나 군사독재정권 30년을 거치면서, 1980년 자유민주주의와 거기에 기초한 시장경제체제의 실체가 드러났다. 이때 많은 사람들은 진정한 민주질서 회복과 정의로운 사회건설 실현을 위한 기본조건이 통일이라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물론 보수적인 사람들도 통일을 말했다. 그러나 이들의 통일은 진보적인 인사들과 큰 차이를 보였다. 제19대 대통령 선거의 후보 모두 남북한 통일에 대해서 말했지만, 그들의 온도차이는 보수와 진도간의 큰 차이를 보였다. 보수적인 인사들의 통일은 자유민주주의로 통일을 내운다. 한국개신교는 복음으로의 통일을 내세운다. 이들을 우파, 극우집단이라고 말한다. 민족대단결을 통한 민족통일을 말하는 인사들은 극진보, 좌경, 용공 등등으로 부른다.

탈공동체성, 권력과 도덕의 이탈

그렇다면 오늘 기독교인들은 어디에 서서 국가와 민족, 교회에 봉사하는가. 그것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모두가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오늘 보수적인 한국교회는 탈집단화가 두드러진다. 철두철미한 자유주의에 따라서 이들의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집단주의를 철저하게 거부한다. 이들이 반대하는 공산주의도 전체주의와 집단주의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이런 관념이 머릿속에 꽉 차 있다. 기독교 국가라는 독일의 히틀러가 유태인 600만 명을 학살한 것은, 유럽인들의 관념이 한 것이지, 히틀러 개인이 600만을 죽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당시 유럽인들의 머릿속에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미워하고 십자가에 못을 박았다”는 관념이 지배하고 있었다.

탈집단화 현상은 한국장로교의 조직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장로교는 총회나, 노회와 같은 조직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개체 혹은 개별교회를 전제로 한 것이다. 따라서 총회나, 노회의 결의사항을 개교회가 거부하면 그만이다.

교회라고 하는 조직을 운영하기 위해서 드리는 헌금 역시 개인적이다. 개인의 결단에 따라서 헌금을 드리는 것이지, 공동체가 결정하는 어떤 틀에 따라서 헌금을 드리는 것이 아니다. 그 헌금이 발휘할 수 있는 종교적 효력 역시 개인적인 것과만 연관되어 있다.

개신교회의 전통에서는 신과의 관계도 집단적 조직에서의 관계가 아니다, 고독한 단독자로서 신과 대명하며, 구원도 개인적으로 받는다. 한마디로 정통적인 조수주의에서는 개인구원만 말 할 뿐, 집단적인 사회적 구원은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감리교회도 그대로 따라서 하고 있다.

보수적인 한국교회는 권력과 도덕성의 일탈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과거의 보수주의는 권력을 도덕적인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도덕적 기반을 상실한 권력은 그 권력으로서 자질을 상실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오늘날 그런 것이 사라졌다. 제1세계의 보수주의자들이 제3세계 독재자들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어떤 도덕적 논거를 제시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데서 그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미국의 보수적인 투자들은 권력의 도덕성을 강력히 주장한 지미 카터를 더 이상 그들의 대통령으로 뽑지를 않았다.

이것은 한국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의 정치지도자들은, 정치적 이익을 위하여 권력을 폭력으로까지 이용했다. 청렴성과 도덕성을 생명으로 하는 군인정신을 상실한 정치군인들의 형태를 보면 그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한국 개신교는 이러한 정치군인들의 권력을 비호해 주었으며, 이들을 등에 업고 온갖 혜택을 누렸다. 이러한 잘못된 정치인들은 한국교회 내에도 얼마든지 있다. 총회장이나, 감독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의 부도덕성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권모술수를 부린다.

한편 보수주의는 업적을 미덕으로 삼는다. 종교개혁의 전통은, 사람은 공로가 아니라, 은총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했다. 개혁교회의 전통은 근검과 절약,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부를 축적하고, 그 부를 이웃과 나누는 것을 예정된 사람의 징표로 생각했다. 이것이 개혁교회의 기초윤리이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는 그렇지 못하다. 물질적 부를 향유하고 그것을 충분하게 사용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축복의 징표라는 것이다. 많이 벌어서 잘살아가는 것을 신의 축복이라고 한다. 큰 교회를 집고 많은 교인을 모아서 많은 헌금으로 많은 일을 하는 것이 곧 목회에 성공한 것이다. 이런 사람이 총회장도, 감독도, 노회장도 한다. 한마디로 업적주의가 교회에서 통용되고 있다. 그렇지 못하고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근검하고 절약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실패한 목회이다. 따라서 교회도 과소비하는 단체로 변질됐다.

 
유럽교회의 전철을 그대로 밟는 한국교회

앞서 지적한 과도한 욕망과 충족, 소비문화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고, 지구의 미래를 위협한다. 분명한 것은 물질적인 풍요는 축복이 아니라, 저주이다. 이것은 미래세대에 대한 오늘날 세대의 무책임성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무너지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보전하고 관리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이 같은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한국교회는 수명을 다한 영미교회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다는 사실이다.

문제의식을 느낀 보수적인 한국교회는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며, 국민들과 전혀 관계가 없는 교회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지나치게 간섭을 한다는데 문제가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동성애에 관한 문제이다. 국민 모두는 동성애가 국민건강과 윤리성, 도덕성, 성의 가치 상실,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위배 등에 대해서 모두가 공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보수적인 교회의 목회자와 여기에 관여된 전문 강사들만 동성애를 들고 나와, 국민과 기독교간의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

한국교회동성애대책위원회가 전면광고로 국민일보에 제공한 ‘가정성결주일 샘플설교’는 국민 모두가 이해하지를 못한다. 영국교회가 왜 수명을 다했는지에 대해서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분열과 갈등에 앞장섰던 인사, 국민갈등을 부추겼던 인사, 이념간, 세대간의 갈등을 조장했던 교회가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의 단합을 강조하고 나섰다. 사회적인 문제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보수적인 교회의 목회자들이, 의제가 무엇이 되었던 사회적인 문제와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그것도 개인적인 구원만을 강조해온 보수적인 교회의 목회자들이 집단적인 사회구원을 말했다는데 기독교의 변화를 에고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 기대된다. 그것도 집단적 사회구원을 위하여 교인들을 향해 헌금을 하자고 한다. 지금까지 보수적인 한국교회는 개인과 개별교회를 위해서 헌금을 드려왔다. 이 헌금으로 보수적인 한국교회는 맘몬교회당을 경쟁적으로 건축했고, 하나님을 호화로운 성전에 가두었다. 그것은 업적주의가 한국교회에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의 전통은, 사람은 공로가 아니라, 은총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보수적인 한국교회는 복음의 본질과 교회의 정체성, 그리고 종교개혁의 전통을 이어받자고 한다.

분명한 것은 한국교회가 돈에 너무나 길들여져 있다는 것이다. 동성애반대운동도 부자교회가 돈을 내면 실무자들이 알아서 하겠다는 것이다. 또 야심찬 세계대회도 준비했다. 분명한 것은 한국교회가 성장이 멈추고, 수명을 다한 영미교회의 전철을 밟고 있는가에 대해서 깊이 반성하기는커녕, 국민들이 전혀 공감하지를 못하는 일들을 붙잡고, 사회를 향해 공격하고 있다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몇몇 교회지도자들의 이러한 돌출된 행동은, 결국 한국교회도 종교간의 갈등을 일으키고, 국민과 교회간의 막힌 담을 더욱 두껍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는 지적의 목소리에 경청해야 한다.

대량소비, 살아남을 수 있는 대안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은 과학기술의 발전에 대해서 낙관적인 태도로 일관한다. 과거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다윈의 진화론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이었다. 반신적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 보수적인 기독교는 그와는 정반대로 생각하고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그것에 의한 대량소비만이 국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으로 생각한다.

오늘날 과학기술의 신화를 믿는 사람치고 보수적인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보수주의의 특성인 탈공동체화, 권력과 도덕의 일탈, 탈금욕주의, 그리고 과학기술에 대한 과도한 낙관주의 등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강화해 나가고 있다.

탈공동체는 권력과 도덕의 일탈을 가져오고, 과학기술에 대한 낙관주의가 금욕주의적 세계관을 무력하게 만든다. 이 반대의 도식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보수적인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반통일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아무렇지 않게 남북한 전쟁이 일어나 100만명이 죽어도 괜찮다고 한다. 또한 남북한의 비핵화를 노래해야 할 목회자들의 힘에서 핵무장을 주장한다. 그렇다보니 보수적인 건물마다, 마을마다 십자가탑은 평화의 상징이라고 누구도 보지를 않는다 오히려 분열과 갈등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 소금의 맛도 잃어버렸다.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