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 수 강 목사

한국교회의 강단에서 행해지는 설교 즉 말씀증거가 그 내용이 선교 초기에는 구원론과 함께 궁핍한 생활을 하나님의 도움으로 해결하기 위해 축복에 대한 설교가 주 내용이었다. 지난 과거 부흥회에 단골로 등장한 설교 패턴은 예수님을 믿으면 물질 축복, 사업 번창, 자녀 출세, 무병장수, 가정 화목을 강조하는 내용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축복의 말씀 증거는 백번을 들어도 싫지 않은 내용이며 또한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는 마음이 성도들에게 크게 자리했다. 교회에 다니는 성도들의 가정이 점점 더 윤택함을 직접 본 주변 지인들은 교회에 다녀 볼까하는 마음이 동해 교회로 인도되는 확률이 높았다.

선교 2세기에 접어든 한국교회는 초기 근면, 성실, 거룩, 경건하게 보이던 교인들의 모습이 간데 온데 없어진 것 같다. 교인 가운데 돈 좀 있고, 행세께나 하는 교만한 자들은 특별대우를 해야 만 붙어 있는 형국을 어떻게 설명해야 옳을지 모르겠다. 예전 교회에 다니던 교우들 속에서 하루하루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지만, 오늘 날에는 그러한 믿음을 가진 진국을 만나기가 가히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고 희소하다. 교회에 다니는 성도들은 많은데 성경이 계시한 말씀의 규격에 꼭 들어맞는 성도가 그리 흔하지 않은 것은 속된 세상만 탓하자는 뜻이 아니다. 그러면 이렇게 형식적이 된 신앙인의 모습을 어떻게 해야 성경에 계시된 그리스도인의 본 모습으로 환원 할 수 있을까? 교회가 풀어야 할 숙제요 고민 중에 하나다.

문제는 강단 설교의 전달 방편이 좀 미숙한 면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직도 대체적으로 주일의 강단 설교내용이 성도들의 비위에 거슬리지 않게 축복 론으로 일갈 하는지? 아니면 교회 강단이 철학 강의나 고생 안하고 저절로 부자 되거나 로또에 당첨되는 비결을 설교 내용으로 대체 하는지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볼 일이다. 기독교 설교 강단은 주로 목회자의 전용이다. 간혹 초청 설교자나 아니면 특수한 경우 제직 중에 연장자가 헌신예배나 기관 예배에 설교 초청될 때를 제외하고는 주로 목회자의 전용 장소다.

강단 위의 설교대나 성경 받침대 사회대 성가대석 그리고 예배 순서에 필요한 이들의 앉을 의자 등등이 그 가격대만 해도 상당하다. 교회의 거룩한 장소인 강단에 고급재료와 값비싼 장식물은 강단의 모양을 좀 더 거룩하게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거기에 소요되는 재원은 모두 헌금이다. 성경에 헌금에 대해 사용처는 초대 교회에서 찾아야 한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헌금과 헌물의 사용처는 구제와 선교에 국한 했다. 신약성경은 예배를 위해 모이는 처소를 위한 건물과 비품 구입을 위한 우선 사용은 침묵하고 있다. 지금 교회의 고급화와 비싼 장식품의 설치는 모두 출애굽기에 기록된 성막 건설의 재원을 차입한 형식이다. 구약과 신약의 의미는 성서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완전히 다르다. 구지 고급화가 필요한가? 그리고 왜 강단의 위치가 높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아야 하는지? 대학 강단이 아래에 있고 학생들은 위로 올라가는 형식을 도입하면 안 되는지? 교회 강단부터 개혁하였으면 하는데 지성소와 성소 사이 경계인 휘장이 갈라진데서 찾으면 어떤가?

한국교회의 변화와 개혁은 고급화된 강단에서의 제사장적인 설교 패턴의 변화부터다. 이는 어느 성도나 제직들의 간섭에 의해서가 아니라 목회자 자신이 스스로 책임져야 할 사항이다. 예수님도 사도들도 전하는 내용은 모두 죄인이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게 되느냐에 중점을 두었다. 기독교의 존재 목적을 분명하게 전해야 하는데 오늘의 설교의 내용은 거의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거나 철학 강의나 생활의 필요한 지식을 제공하는 예가 허다하다. 이제부터 목회자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만 구약에서 도입 할 것이 아니라 구약의 정신도 도입하자는 의미다. 가령 선지자, 예언자, 선견자들의 역할 중 판관의 권위는 내려놓고 그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어떻게 수행 했는지에 관심을 가지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들의 사생활이 어떠했는지를 공부하자는 말이다.

목회자들이 추구하는 신앙 목적이 경건하고 거룩할 때에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 선포는 자연 성령의 대변인 사명을 완수 할 수 있다. 그렇게만 되면 설교를 경청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설교자의 인성과 경건 그리고 거룩한 성품에서 걸러진 설교를 들을 때에 역시 성령의 감화 감동으로 고백과 회개가 일어나고 경건 된 생활을 다짐하게 된다. 오순절 성령 받은 자의 복음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파됨이 초기 교회의 유물이 아니라 오늘도 가능하다. 이를 위해 목회자와 성도 사이 경계가 허물어지는 변화가 꼭 필요하다.

필운그리스도의교회/ 본지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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