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우리가 자기에게만 과도하게 몰두함으로써 다른 이의 아름다움을 음미할 줄 모를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를 경고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스의 신화 나르키소스 이야기다. 사냥꾼인 나르키소스는 뛰어난 외모로 남들이 베푸는 사랑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청년이다. 에코라는 숲속의 요정이 그를 사랑했지만 나르키소스는 그녀의 구애를 아랑곳하지 않았다. 복수의 신은 나르키소스를 벌하기 위해 물가로 데리고 갔다. 나르키소스는 물에 비친 자기 모습과 사랑에 빠진다. 자기에게 상사병이 걸린 나르키소스는 하염없이 물에 비친 자기를 응시하다가 죽게 된다.

면역학자 율라 비스는 이 이야기를 우리 몸에 있는 각종 세균을 비자기(nonself)로 배척하려는 그릇된 인식을 설명하는 데 사용한다. 우리 몸 안의 수많은 미생물은 퇴치해야 할 병균이 아니라 공존해야 할 동료이기도 하다. 몸 안의 미생물은 소화를 돕고, 비타민 합성을 거들고, 해로운 균의 증식을 막아준다. 우리가 미생물에 얼마나 의지하는지를 고려한다면 우리 몸이 그들 미생물을 타자로 여기지 않는 게 온당하다. 예컨데 면역학자들에게 임신은 오랫동안 수수께끼였다. 왜 여성은 자기 몸 안의 비자기인 태아를 ‘참아주는가?’ 라는 의문이다. 마침내 얻은 답은 태아가 여성의 몸 안에서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건 여성의 몸이 그것들을 위험한 존재로 인식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율라 비스에 의하면 여성의 자궁은 무균상태이다. 따라서 출산은 수많은 균들을 접촉하게 되는 최초의 예방접종이기도 하다. 아기는 산도를 통과하면서 미생물을 얻고, 그 미생물은 이후 오랫동안 아기의 피부와 입과 폐와 장에서 서식한다. 그리하여 우리 몸은 출생과 동시에 계속 미생물과 공유된 공간이다. 우리는 자기 안의 비자기를 ‘참아주기만’ 하는 게 아니라 그것에 의지하고 그것 덕분에 보호를 받는다. 이 말은 우리가 세상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수많은 비자기들에게도 적용된다고 볼 수 있다. 우리 몸이 다른 많은 미생물과 함께 균형을 이루어 살아가는 정원이듯이, 우리 사회 안의 비자기들을 배척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사회가 성숙한 사회임은 말할 것도 없다.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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