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성경학교

첨탑의 십자가가 하늘에 대고, 누적된 것을 긁는다. 죄일 수도 희망일 수도 있는. 예수는 지금쯤 교회 지붕에서 투신할 준비를 마쳤을지. 어린이들은 긍휼이라는 달고 시원한 빙과를 조금씩 녹여 먹고 있었다. 올해도 심판은 불발. 나는 어젯밤 술이 덜 깬 일개 교사이며, 성경을 완독한 적이 없다. 상처는 때로 훌륭한 장난감일까. 새 신자의 자살 소식이 들려오고, 그의 어린 아들은 환한 웃음을 짓고 있다. 연이어 밀알 같은 물풍선이 망설임 없이 터진다. 헌금할 돈은 종종 빠뜨리지만 꼬깃꼬깃한 연민은 주머니에 늘 두둑하므로, 죄질에 상관없이 우리는 모두 형제자매들. 해외선교를 준비하는 청년들이 바자를 열고, 권사들은 그들에게 봉헌하고 있다. 유년을 같이 한 몇몇 청년들은 전도사가 되어 사역하러 나갔지만, 나는 여전히 나의 죄가 무엇인지 모른다. 지폐 몇 장이 속죄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종종 내 심장을 애무하는 목사의 공수에는 톡톡히 화대를 치르는 법. 어떤 몰약이 모태에서 물려받은 원죄와 신앙을 씻어낼 수 있을까. 뱀은 늘 흥미로운 상징이며, 내 오래된 성경책의 얼룩진 앞장에는 익사한 활자들이 몇 개의 계명을 힘없이 떠받치고 있다. 교회에서 받은 성금 통은 나날이 무거워지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가장 불우한 이웃은 가족이다. 가족들은 늘 신보다 먼저 나를 용서하고, 나는 매일같이 그 형벌을 구걸한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 날은 온종일 입맛이 없었다. 주일이면 꼭 회개하는 육일간의 탕아. 굴종은 오랜 나의 학습이다.

-『현대시』 17년 4월호에서

▲ 정 재 영 장로
이 작품은 여름성경학교의 어린이, 교사, 목사와 권사, 청년들의 역할을 보며 종교에 대한 성찰의 소감을 담고 있다.

교사로 교회에 대한 인식, 청년들의 헌신과 권사들의 도움과 성직자로의 나가는 동료의 결단길 보면서, 사회생활과 교회교사로의 직분을 감당하는 현실과 신앙의 괴리로 갈등하는 정서를 보여준다.

시와 산문의 구별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그 기준은 외형적 형태가 아니다. 표현하는 기법에서 산문시와 산문을 구별한다. 비록 산문의 모습이라도 시의 비유와 상징이 담겨지면 시가 되는 것이다. 역으로 아무리 행갈이를 해도 시에서 요구하는 수사학적 기법이 없으면 그것은 산문이라는 말이 되는 것과 같다.

이작품은 산문 형태이지만 구성으로 보면 시의 형식으로 만든 작품이다. ‘십자가가 하늘에 대고, 누적된 것을 긁는다’라 하는 거나 ‘성경책의 얼룩진 앞장에는 익사한 활자들이 몇 개의 계명을 힘없이 떠받치고 있다’는 표현에서 묘사와 진술을 적절하게 배합하고 있다. 시는 표현에서 묘사의 부분에서 생명을 가진다. 그러나 모두 묘사로만 되었다면 이미지 연결성의 결여로 소통을 막는다. 반대로 진술만 있다면 그것은 설명의 기능을 가진 산문이다.

이 작품의 내용안에 풍자와 해학의 모습이 있다. 그 미학성을 골계미라 한다. 그 속에는 문학적 아픔, 즉 순수한 통징(痛懲) 또는 엄징(嚴懲)이라 하는 문학목적론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교정(矯正)이라는 문학의 기능을 수반한다.

풍자는 대부분의 경우 타자를 대상하고 있는데, 이 작품은 화자 자신에 시각을 맞추고 있다. 다른 대상을 취급하는 작품에서는 투정이나 비난에 머무르게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작품은 자아에 대한 고백으로 아무런 거부감이 없이 납득이 된다.

전 한국기독교시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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