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승 자 목사

필자는 6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명명하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했다. 그 기도는 필자가 기도원을 개원한 이후 한반도의 평화와 한민족의 화합에 맞추어져 있었으며, 지금까지 계속해 오고 있다. 그리고 참평화가 무엇인지를 골방에 앉아 묵상했다.

과거에는 전쟁만 없으면, 총을 쏘지 않으면, 그래서 사람이 피를 흘리지 않으면, 이것을 평화라고 했다. 그것은 아니다.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언제나 목격해 왔다. 양성화된 것만이 전쟁이 아니다. 오히려 음성적인 전쟁이 더 치열하다. 이것을 냉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미국과 소련은 전쟁준비를 위한 무기개발에 경쟁을 벌였다. 지금 세계의 핵무기 중 대부분은 냉전시대에 만들어진 것 들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만들어진 핵무기는 인류를 20번 전멸하고 남는다고 한다.

과거의 평화는 안일주의와 같은 것이었다. 네 것, 내 것의 한계를 알고 서로 협상하며 살면 될 것 아니냐. 기존질서를 유지하고 기득권을 유지하면서 적당히 싸움하지 말고 사는 것이 평화로 알았다. 이런 사고는 종교적인 측면에서 불가능하다. 성서의 평화는 기존질서의 안일을 위한 것이 아니다. 평화운동은 매우 능동적인 것이다.

사랑은 미워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상대방이 나를 개방해서 나에게로 들어올 수 있도록 나를 활짝 여는 것이다. 이것은 내 기득권을 지키는 것이 아니며, 다른 사람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살인하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형제를 보고 미워하는 것이 살인한 것과 똑같다”고 했다. 예수님은 피를 흘리거나 목숨을 끊는 것만이 아니라, 미워하는 것 자체가 이미 살인한 것과 똑같다고 했다. 이것은 총칼을 들고 싸우는 양성화된 것이나, 음성적인 전쟁 모두가 평화를 파괴하는 행위라는 것을 교육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평화를 해치는 일들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우리의 적대관계에 있는 북한은 핵무기를 개발하고, 미사일을 쏘아 올린다. 전혀 한반도는 물론, 세계평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을 하고 있다. 북한의 인민 모두는 김정은 한사람을 위하여 모두가 희생을 당하고 있다. 여기에 맞서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미국을 비롯한 중국, 일본, 러시아 등 강대국들은 분단의 당사들을 제외시키고 평화을 말한다. 대한민국 국민의 한사람으로 자존심이 상한다. 또한 아프리카와 중동에서는 전쟁을 피해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지중해를 건너다가 수장된다.

예수님은 진일보한 평화의 의미를 내놓았다. 예수님은 “원수도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라”고 했다. 참평화운동이란 이런 것이 아닌가. 평화를 방해하는 근원적인 것을 공격해야 한다. 그것을 방해하는 것은 지금까지 살펴 본대로 종교의 집단성과 관념이 아닌가. 그런데 예수님의 참사랑과 평화는 기독교를 교리화시킴으로서 본질이 흐려졌다. 예수님은 교리를 주기 위해서 오시지 않았다.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평화를 주기 위해서 오셨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지금은 평화를 방해하는 구조성이 그때와는 아주 다르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평화를 방해하는 구조악에 맞서 선한싸움을 벌여야 한다. 이것이 6월 보훈의 달에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아닌가 싶다.

햇빛중앙교회•본지 후원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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