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평화를 이 땅에 갈물처럼 끌어들이며/민족들의 평화를 개울물처럼 쏟아져 들이는 일을 이 민족에게 허락하소서/하나님의 말씀과 거짓된 말들을 분별케 하는 성령을 우리에게 허락하소서/하나님. 우리는/이 땅에서 힘 있는 자들이 당신 앞에서 무서워 떠는 날을 대망합니다/이 땅에서 이름 없이 죽어간 이들이 당신 앞에서 기억되는 날을 대망합니다/…(중략)…/분단의 민족이 하나 되는 구원의 날을 대망합니다. 백두산과 한라산이 하나 되고 이 땅의 산들과 언덕들과 바다들이 우리 앞에서 소리 높여 노래하며, 들의 모든 나무들이 손뼉을 치며, 당신의 나라를 찬양하는 날을 대망합니다…”(기독교 100주년에 드리는 여성의 기도 중)

이 기도는 한국기독교 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 여성분과위원회가 기독교선교 100주년을 맞아 드리는 여성의 기도문 중 일부이다. 분단을 넘어서 평화를 간구하는 기도이다. 분단 72년, 한국전쟁 67년을 맞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한국기독여성들의 평화를 향한 간구이다.

지금까지 한반도의 분열은 한민족에게 있어서 정치적, 이념적으로 이용되어 왔다. 그래서 나라와 민족을 이야기 하는 모든 국민들은 통일이 되지 않고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해답을 얻었다. 또한 한민족의 평화, 평화적인 남북통일은, 세계평화를 가져다가 주는 또 하나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북한의 핵개발과 미사일 발사, 남한의 사드배치 등을 둘러싼 소모적인 논쟁은 평화와 안전을 담보할 수 없다. 지금 세계는 인류 200번을 진멸할 수 있는 가공할만한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 인류의 평화를 파괴하면서 평화를 내세우는 세계의 패권자들이 말하는 평화는 한마디로 거짓 평화이다.

이 기도문은 참된 평화는 무기에 의해 보장되지 않음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것들을 파괴해버린다는 것을 선포한다. 그리고 노래한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면, 평화를 노래하는 교회는 아닌 것 같다.

평화를 기도하고 노래하면서 우리는 평화 없는 민족과 세계를 직시하고, 증언해야 한다. 지금 세계는 핵무기 아래 있으면서 평화의 시대라고 말 할 수 없다. 남과 북이 대치하고 있으면서 평화의 시대가 도래 했다고 말 할 수 없다. 전쟁과 내전을 피해 보다 나은 삶을 찾아 떠나는 민족이 있는 한 평화의 시대는 요원하다. 먹을 것이 없어 매년 8000만명이 죽어가고 있는 오늘의 시대를 평화의 시대라고 말 할 수 없다.

그렇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기도문이 담고 있는 것처럼 민족 분단과 군사적 대립관계를 방치하면서 평화를 기도하고, 노래할 수 없다. 그럼에도 오늘 한국교회의 목회자와 교인들은 공 예배 기도와 골방기도에서 평화통일을 위해서 기도한다. 이런 기도는 헛소리요 거짓말이다. 행동하지 않는 기도이다. 한국교회의 침묵은 반성서적이며, 반 그리스도적이다. 예수님은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에서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다. 한국에 있어서 그 곳은 어디인가? 분단의 현장이 아닌가?

또 이 기도문 속에는 민족들과 인종들 사이의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 사회에서의 빈부의 차별, 남자와 여자의 불평등한 관계, 종교 간의 분쟁이 계속되는 한 평화가 없다는 것이 그대로 담겨 있다.

이제 세계상황에 휘말려 든 교회는 평화를 기도하고 노래할 자유와 하나님의 평화에 참여 할 자유를 회복해야 한다. 성서에서 말하는 평화(샬롬)의 미는 창조자 축복 아래서 자연과 화합하는 삶, 사회에서의 번영을 향유하는 삶을 의미한다. 세계 패권자들이 과학기술과 결탁, 핵무기를 계속해서 생산하면서 창조자 하나님의 축복, 특히 세계의 가난한 민족의 삶을 박탈하는 일을 자행하면서, 평화를 운운하는 것은 죄악이다. 범죄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역사적, 민족적 상황을 인식하고, 참된 평화를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그리고 평화 없는 세계와 분단된 조국의 한복판에서 증언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참된 평화의 길로 가는 길이다.

/유달상 기자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