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계신 자리에 맘몬

얼마 전 미국에서 온 세계한국인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인 황의춘 목사는 “오늘 한국교회가 엉망진창이 된 것은, 하나님의 자리를 목회자들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 오늘 세계와 대한민국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승리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찬양과 경배, 그리고 영광을 받아야 할 이도 위대한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한다. 승리한 것은 자본주의적 세계경제체제이며, 찬양과 영광을 받는 것도 그 체제를 뒷받침하고 있는 미국의 달러로 상징되는 맘몬이라는 우상이다. 오늘날 세계 자본주의 보편문명은 북한에서 까지 팔리고 있는 코카콜라를 통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서구의 자본주의 원리는 중동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에서도 팔리고 있는 햄버거를 통해 철저하게 관철되고 있다.

서구의 자본주의 보편문화는 기독교라는 이름을 내세워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중동까지 정복해 가고 있다. 이러한 자본주의 문명은 오늘 전 세계에 대한 정신적 승리자요, 심리적 정복을 띠고 있다. 우리 삶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다. 자본주의경제체제 시장의 상징인 맘몬이라는 우상이다. 그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계신 자리에 마몬과 바벨이 자리하고 있다. 또 교회가 있어야 할 자리에 교회는 없다.

식민주의와 선교의 종합이라는 이름으로 남미를 정복한 유럽인들은 식민지 원주민들에게 유럽의 언어를 쓰게 했고, 유럽의 옷을 입혔으며, 유럽의 가치관을 강요했다. 남미의 작가 갈레아노는 “콜럼버스 이후부터 남미의 문화는 민속이 되었고, 그들의 종교는 미신이 되었다. 그들의 언어는 방언이 되었고, 예술품은 수공업이 되었다”고 비판했다.

한마디로 유럽의 것은 세계민족의 윤리학 있어서 가치기준이 되어버렸다. 다시 말하면 유럽의 것은 아름답고, 여타의 것은 추하다는 말이 된다. 그것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유럽의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는 우상이 되었고, 여기에서 벗어난 모든 것은 잘못된 문화로 평가하는 관념에 사로잡혀, 이웃종교와 마찰을 빚고 있다. 고등종교를 인정하지 않는다. 천주교도 미신으로 치부한다. 또한 이웃종교와의 대화하는 진보적인 교단과 교회를 향해 이단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보수적인 한국교회는 수천억원을 삼켜버린 맘몬교회당을 건축하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그 곳에 가두어 버렸다. 그리고 이것을 축복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이 승리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세계경제체제가 승리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것은 또 하나님의 자리에 맘몬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맘몬이 신이 되어버렸다. 그렇다. 교회 역시 하나님 승리한 것이 아니다. 우상인 맘몬이 승리했다.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시장(맘몬)이 들어섰고, 이 신의 현현은 다우존스 주가지수이며, 그의 성체는 미국의 달러이고, 그의 미사는 환율조정이며, 그의 나라는 그램린의 지도자까지 찬양했던 자본주의적 보편문명이다”(독일 잡지 <슈피겔>의 기자가 콜럼버스 미 대륙 발견 500주년을 맞아 기고한 글 중)

이 글은 신의 자리를 빼앗은 오늘 한국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교인들은 하나님이 계실 자리를 맘몬이 빼앗아 버렸다고 서슴없이 말한다. 미국서 온 목회자도 거침없이 말한다. 이것이 바로 세계교회가 한국교회를 바라보는 시각이다.

이를 반영이라도 하듯 오늘 한국교회의 신뢰도는 바닥을 치고 있다. 목회자의 신뢰도 또한 그렇다. 한국교회는 맘몬에 길들여지면서, 선교초기 가난하고 천박한 조선의 백성들에게 봉사하며, 이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인 그 공로를 모두 잃어버렸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맘몬과 바벨을 노래한 나머지 너무 부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을 보수의 가치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하나님이 있어야 할 자리에 맘몬이 차지

보수의 가치를 말하는 한국교회는 보수 자신들이 감당해야 할 생명운동을 비롯하여 하나님의 창조질서운동, 환경운동, 사랑실천운동 등을 시민단체 또는 진보적인 교회에 넘겨주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있어야 할 자리를 빼앗았다. 즉 돈이 신이 되어 버린 것이다. 목회자들의 입에서는 ‘돈’의 소리가 절로 나온다. 이제 하나님나라의 척도와 믿음의 척도는 헌금의 액수로 판가름 한다. 그렇다 보니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에서 설자리를 잃어버렸다. 교회는 헌금을 많이 내는 부자들의 눈물을 닦아주기에 바쁘다. 하나님이 있어야 할 자리에, 욕망과 탐욕에 가득한 인간들이 자리 잡고 있다.

더욱이 우스운 것은 이들이 철따라 옷을 갈아입는다는 것이다. 권력의 주변을 맴돌며,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에 바쁘다. 누가 보아도 좋은 모습은 아니다. 잘못된 정부의 대변인 역할을 감당했던 이들은,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자 곧바로 변신했다. 그리고 기도회 및 축하예배를 드린다며, 일간지에 광고를 낸다. 한마디로 우습다. 권력을 쫓아다니는 전형적인 한국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것이 바로 한국교회가 말하는 선교이며,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방법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한국교회가 있어야 할 자리에 교회는 없다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자리에 맘몬(돈)이 들어섰다. 이것은 교회가 가져야 할 보편적 가치를 스스로 버렸다. 오늘 현장목회자나, 현장을 떠난 원로목사나 모두가 돈 앞에 무릎을 꿇는 모습은 한마디로 천박하다. 또한 부자교회 목회자의 주변을 맴돌며, 이들의 대변자 역할을 자처한다. 돈만 받으면 문제의 목사에게 면죄부도 준다.

수년전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과 합동측은 대형교회 목회자가 이단문제에 걸려들자, 이 두 교단의 지도자들은 이 목사에 대해 면죄부를 주었으며, ‘교회성장론’에서 헤어나지를 못하는 목사들은, 문제가 된 목사의 음성까지도 흉내 내는 웃지 못 할 일이 한국교회 안에서 일어났다. 그러면서 통합측과 합동측, 합신측 등 몇몇 교단은 이웃교단의 신앙과 신학사상을 존중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신학과 신앙이 다르면 무조건 이단의 올무에 씌운다. 이로 인해 상처를 받은 교회와 교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오늘 한국교회는 이단의 문제가 아니다. 사이비의 문제이다. 우상인 맘몬을 좋아하는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좋은 교회당을 건축하고,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교인들의 주머니를 짜낸다.

하나님이 있어야 할 자리에 인간이 들어가 탐욕과 만용을 부리는 것이다. 이런 현실을 보는 세상 사람들은 한국교회를 절대로 신뢰하지 않는다. 가난한 교인들은 교회에서 위로를 받지 못하고 떠난다. 한마디로 한국교회는 사이비들로 몸살을 앓고 있다. 많은 목회자들이 맘몬에 길들여진 나머지 사이비행각을 벌이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오늘 목회자 모두는 가슴에 손을 얹고 스스로 생각해 볼 때라는 것이 일반적인 지적이다.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라고 한다(회개).

최근 원로목사들을 위한 잔치를 보면 그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원로목사들을 위해서 쓰여 지는 재정이 어떻게 조성된 재정인지에 대해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시한부 종말론’에 미혹된 교인들이 사이비교주에게 바친 재산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시한부종말론에 미혹된 사람들 중 전 재산을 바치고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했다는 사실에 대해 원로목사들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당시 우리사회를 혼란에 빠트린 잘못을 인정이라도 하듯, 면죄부를 받기 위해 원로목사들을 철저하게 이용하고 있다는 지적의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이다. 한국교회와 사회를 혼란에 빠트린 잘못에 대해 최소한의 설명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시한부종말론에 빠져 전 재산을 사이비교주에게 바치고, 죽음의 길을 선택한 사람들의 헌금이라는 사실을 한번쯤 생각해 보았는가. 그런데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이 맘몬 앞에 바짝 엎드린 모습을 보면, 참담하다. 구역질까지 난다.

이에 대해 한 원로목사는 “친구 목사들의 권유로 원로목사 잔치에 참여했다. 그런데 많은 의혹을 갖게 되었다. 대접하는 이들은 아무 조건 없이 대접하겠지만, 이 재정이 어디에서 나왔는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면서. “만약 이 재정이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고서는 색안경을 끼고 이 단체를 세심하게 관찰할 수밖에 없다. 평생을 목회현장에서 깨끗하게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인 원로목사들이 말년에 맘몬 아래 무릎을 꿇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지적했다.

‘선교’란 이름 아래 노골적인 수탈과 침략

돈이 신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세상은 온통 돈에 대한 소리만 들린다. 오늘 우리사회는 아는 것이 힘이 아니다. 군대가 강한 것도 아니다. 대통령이 강한 것도 아니다. 장군이나, 대통령은 사라지지만 영원한 것은 돈이다. 돈이 있어야만 물질적인 것을 소유할 수 있다. 돈이 있어야 나라도 운영하고, 가난한 사람도 도와 줄 수 있다. 또 교회당도 짓고 선교도 할 수 있다. 명예도, 권력도 돈이 있어야 얻을 수 있다.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돈만큼 강한 것이 없다. 하나님이 전능하듯이 돈도 전능하다. 때문이 오늘 한국교회는 신의 자리에 돈을 앉혀 놓았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교회법을 목사중심으로 만든다. 교회내규도 목사에게 유리하게 만든다. 교인들은 교회내규에서 철저하게 소외된다.

무능한 부자 목사의 아들은 아버지를 잘 만나 큰 교회를 그대로 물려받는다. 큰 교회를 물려받으면, 그는 능력자이다. 자타가 인정하는 목회자들도 그 앞에서는 고양이 앞에 쥐가 된다. 아무리 공부를 잘하고 성실해도 돈이 없으면 무능력한 목사이다. 공부를 못하고 근면하지 못해도 돈만 있으면 능력 있는 목회자이다. 요즘 한국교회는 돈이 목회자를 만든다.

푼돈을 받은 정치인과 공무원은 철장신세를 지지만, 수백억원의 부정한 정치자금을 준 기업인들은 면죄부를 받는다. 검찰은 소환해서 조사한번 않는다. 부자 목사들 역시 잘못을 저질러도 총회에서 눈감아 준다. 또 부정한 돈으로 총회장도 산다. 감독도 산다.

교회를 지배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그의 정신이 아니다. 예수님이 그렇게도 배척하던 돈이 교회를 지배한다. 어느 교회는 장로가 되기 위해서 1억원을 받쳐야 한다. 신앙심이 좋다고 장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교회는 하나님과 맘몬을 함께 섬기려고 했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잘못은 영미와 유럽의 상업자본주의 체제를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이다. 유럽의 교회들이 세계화 또는 선교라는 이름 아래 가난하고, 천박한 세계민족에게 얼마나 고통을 주었는가. 기독교의 세계화라는 이름아래 가난한 나라의 백성들이 얼마나 고난을 당했는가.

한국교회는 미개한 조선의 백성들에게 유럽의 선진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 받았기 때문에, 우수한 선진문화를 보급해 주었기 때문에 ‘축복’이라고 거침없이 말한다. 이런 사이에서 제3세계의 가난하고 미개하고 천박한 백성들은 죽임을 당했으며, 자신들의 자리를 그들에게 내 주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빼앗기고, ‘혼’까지 그들에게 내 주었다. 이런 그들의 행위는 모두 ‘선교’라는 이름 아래 자행되었다.

그럼에도 보수적인 한국교회는 영미와 유럽의 영향을 받아 대한민국이 축복을 받은 것이 바로 기독교를 받아드린 결과라고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기독교의 선교가 시작되면서, 수명을 다한 이씨조선의 천박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깨어나기 시작했고, 남녀평등이라는 새로운 세상을 열 수 있다. 그럼에도 일각에서는 선교초기 영미선교사들의 선교형태가 어떠했는가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하고, 바른 역사를 정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조선의 선교는 선교사들에 의해서 주창된 정교분리원칙에 따라 민족의식과 역사를 몰각하는 잘못을 범했다. 그럼에도 기독교 선교는 가난하고 천박한 백성을 향한 교육사업과 봉사, 그리고 평등과 도덕성 회복에 크게 공헌했다.

유럽의 시장경제 체제와 콜럼버스에 의해서 시작된 기독교의 세계화는 하나님의 자리에 맘몬으로 대치시키는 오류를 범했다. 새로운 세상,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처럼 맘몬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있어야 할 자리에 하나님을 모셔야 한다.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