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명 찬 목사

보수적인 한국교회가 오늘의 정치현실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의 목소리가 높다. 그것은 이번 대통령선거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최태민-최순실 국정농단 과정서 보수적인 한국교회가 보여준 행동은, 한국교회사에서도 그대로 관통하고 있다. 이것은 미국의 보수적인 선교사들에 의해서 한국선교가 시작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미국 장로교 해외선교부 총무 아서 브라운 박사는 자신의 저서 <극동의 지배>에서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100년 전 그들의 조상이 스코틀랜드에서나 지키던 신앙 이론과 실천을 한국의 개신교인들에게 요구했다. 당시 미국에서도 요구하지 않던 보수의 신앙과 실천을 한국의 개신교인들에게 강요한 것이다. 따라서 한국교회의 보수주의의 목표는 세상을 멀리하고 영혼구원을 얻어서 하나님나라에서 영생 복락을 누리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보수주의적 신앙 형태가 한국 개신교의 기초를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비판했다.

사실 한국교회는 일본제국주의 아래서 ‘정교분리원칙’에 따라서 행동해야 했다. 한국개신교는 보수적인 신앙선교와 정교분리원칙에 따라서 교인들에게 ‘영혼구원’만 가르쳐야 했다. 보수신앙과 제국주의 신학, 지배자의 이데올로기적인 신학을 그대로 전해준 선교사들과는 달리, 한국교회의 깨어난 지식인들은 만민공동회의나, 신민회와 같은 단체를 통해서 민족문제에 가담, 교회를 통해서 민족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을 모색했다.

그러나 이러한 애국적인 독립운동과 민족운동은 보수적인 선교사들에게 교회의 정치화로 낙인찍혔다. 또한 선교국의 선교정책과 배치되는 것으로 거부당했다. 당시 장로교 공의회는 교회의 정치참여를 금지하는 결의를 하는가 하면, 1907년 부흥운동을 통해 민족적 기독교를 ‘순수한’ 기독교로 전환시키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

이 운동은 한국교회의 탈정치화, 보수화의 기초를 형성하는데 결정적이었으며, 이러한 보수성은 1920년대 사회주의 운동과 대결하면서 깊숙이 내면화-체질화되었다. 해방까지 한국개신교회는 거의 완전하리만큼, 이들 보수주의의 보루가 되었으며, 일본 식민지세력의 충실한 충견이었다. 한마디로 한국개신교는 일본국가주의에 쉽게 굴복, 하나님을 배신하는 ‘배교행위’인 신사참배를 결의하는 등 반민족적이며, 반신앙적인 모습을 그대로 드러냈다. 여기에 익숙해진 한국개신교의 목회자들은, 제19대 대통령선거 기간동안 가짜뉴스를 퍼 나르기에 바빴다. 그것은 선거가 끝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한마디로 보수적인 한국개신교는 해방 후 지금까지 정치적인 보수주의와 그 궤를 같이하면서 충성스러운 동맹세력이 되었다. 이렇게 한국교회는 보수주의적 정치체제를 지원하고, 이들로부터 도움을 받는데 별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정교분리정책이 철저하게 악용되었다.

정교분리를 처음 주창한 인물은 존 로크이다. 존 로크는 <관용에 관한 편지에서>에서 “종교적 관용을 참 교회의 가장 중요하고 특정적인 표식으로 간주한다”라고 쓰고 있다. 그러나 그는 “국가 또한 관용의 자세를 게을리 하면, 참평화가 깨지고 전쟁이 일어난다”고 보았다. 무엇보다도 존 로크는 “국가가 종교적인 사인에 대해서 간섭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국가는 종교적 사안에 대해서 관용의 자세를 가져야 하며, 시민적 법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에 대해서만 최소한으로 관여해야 한다”고 했다.

반면 홉즈는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것에서 최상의 것을 찾으려고 했다. 홉즈는 “교파간의 갈등을 극복하고 종교 간의 싸움을 막기 위해서는 국가가 개입, 분열과 다툼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국가교회를 철저하게 주창했다. 홉즈와 존 로크의 학설은 오늘 보수적인 한국개신교가 말하고 있는 정교분리와 국가교회와는 사뭇 다르다. 분명한 것은 한국교회가 진정한 보수신앙의 가치를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예장 한영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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