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 종 문 목사

오늘 기독교인들은 어디에 서서 국가와 민족, 교회에 봉사하는가. 그것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모두가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오늘 보수적인 한국교회는 탈집단화가 두드러진다. 철두철미한 자유주의에 따라서 집단주의를 철저하게 거부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반대하는 공산주의도 전체주의와 집단주의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이런 관념이 머릿속에 꽉 차 있다. 기독교 국가라는 독일의 히틀러가 유태인 600만 명을 학살한 것은, 유럽인들의 관념이 한 것이지, 히틀러 개인이 600만을 죽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당시 유럽인들의 머릿속에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미워하고 십자가에 못을 박았다”는 관념이 지배하고 있었다. 탈집단화 현상은 한국장로교의 조직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장로교는 총회나, 노회와 같은 조직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개체 혹은 개별교회를 전제로 한 것이다. 따라서 총회나, 노회의 결의사항을 개교회가 거부하면 그만이다.

교회라고 하는 조직을 운영하기 위해서 드리는 헌금 역시 개인적이다. 개인의 결단에 따라서 헌금을 드리는 것이지, 공동체가 결정하는 어떤 틀에 따라서 헌금을 드리는 것이 아니다. 그 헌금이 발휘할 수 있는 종교적 효력 역시 개인적인 것과 연관되어 있다.

개신교회의 전통에서는 신과의 관계도 집단적 조직에서의 관계가 아니다, 고독한 단독자로서 신과 대면하며, 구원도 개인적으로 받는다. 한마디로 정통적인 보수주의에서는 개인구원만 말 할 뿐, 집단적인 사회적 구원은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진보적인 교단이라고 말하는 기장도, 감리교회도 그대로 따라서 하고 있다.
또한 보수적인 한국교회는 권력과 도덕성의 일탈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과거의 보수주의는 권력을 도덕적인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도덕적 기반을 상실한 권력은 그 권력으로서 자질을 상실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오늘날 그런 것이 사라졌다. 제1세계의 보수주의자들이 제3세계 독재자들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어떤 도덕적 논거를 제시하려고 하지 않는다는데 그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미국의 보수적인 투자들은 권력의 도덕성을 강력히 주장한 지미 카터를 더 이상 그들의 대통령으로 뽑지를 않았다.

이것은 한국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의 정치지도자들은, 정치적 이익을 위하여 권력을 폭력으로까지 이용했다. 청렴성과 도덕성을 생명으로 하는 군인정신을 상실한 정치군인들의 형태를 보면 그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한국 개신교는 이러한 정치군인들의 권력을 비호해 주었으며, 이들을 등에 업고 온갖 혜택을 누렸다. 심지어 이들의 피묻은 손에 축복기도를 해 주었다. 이러한 잘못된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앉아 한국교회의 정체성을 흔들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는 물질적 부를 향유하고 그것을 충분하게 사용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축복의 징표라고 말한다. 많이 벌어서 잘살아가는 것을 신의 축복이라고 한다. 즉 큰 교회를 건축하고 많은 교인을 모아서 많은 헌금으로 많은 일을 하는 것이 곧 목회에 성공한 것이다. 어느 큰 교회 목사는 그렇게 성공하지 못하는 것을 죄라고 했다. 이런 사람이 총회장도, 감독도, 노회장도 한다. 한마디로 업적주의가 교회에서 통용되고 있다. 그렇지 못하고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근검하고 절약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실패한 목회이다.

예장 통합피어선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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