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한국전쟁과 기독교'라는 글을 쓴 장병욱 목사는, 한국전쟁 중 목사들의 행동에 대한 부끄러운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공산주의자들이 기습 남침을 감행해 26일 춘천과 강릉이 함락되고 포천이 붕괴되자 27일에는 이승만 대통령 내외가 “서울을 사수한다.”는 녹음방송만 남긴 채 서울을 빠져나갔다. 그 시간 종로 2가 기독교서회 2층 NCC사무실에서는 기독교 지도자 40여 명이 모여 서울의 교회와 양떼의 사수 문제를 놓고 토론이 벌어졌다. 그때 1947년 월남했던 한경직 목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서울은 사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제 강점기에 목사들이 항거 한번 못하고 신사참배로 맥없이 천조대신 앞에 무릎을 꿇은 잘못을 참회하는 의미에서라도 양떼를 지키고 수도를 지킬 순교적 각오를 가지자는 지론이었다. 결론은 사수. 목자가 양을 버리고 어찌 달아날 수 있겠는가. 달아나는 자는 목자가 아니요 삯군이라는 논리가 깊게 깔려 있었던 것이다.

같은 날 서울의 중앙감리교회에서 열린 교역자 회의에서도 NCC에서와 똑같은 장면이 재연되고 있었다. 이곳 토론에서도 황해도에서 목회하다 월남한 이병남 목사는 공산당에 맞서 싸워야 한다며 강한 서울 사수를 주장했다. 반론에 나선 박설봉 목사는 격한 어조로 “원수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기독교가 어떻게 총을 들고 대적하는가. 우리의 사명은 총칼이 아니라 복음 선교다. 사수냐 피난이냐는 우리의 역할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여기서도 대세는 서울 사수. 양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버리는 선한 목자의 표상을 가지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다음날 28일. 서울이 적의 손에 떨어지기 직전, 그렇게도 강력하게 사수론을 펴던 목사들은 아무도 몰래 보따리를 챙겨 피난을 떠났다. 순진하게도 사수론을 믿고 피난을 떠나지 못한 목사들은 지하실에 숨어 숨을 죽이고 있었다. 서울이 함락된 지 일주일 만에 지하실에서 단파방송을 듣고 있던 강원룡 목사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한경직 목사가 대구에서 방송하기를 목자는 양과 함께 순교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아 있던 사람들은 인민군 환영대회를 치렀다. 장병욱 목사는 이를 두고 ‘현대판 베드로의 고백’이라고 했다.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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