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인간적인 삶과 가정의 회복
면죄부 판매를 거부하는 루터의 반론이 나오기까지, 중세 말기에 유럽 기독교는 여러 차례 큰 변화를 겪고 있었다. 종교개혁은 진공상태에서 갑자기 영웅 한명이 뛰어나와 사람들을 이끌고 나간 것이 아니다. 그 배면에는 14세기에 로마 교회의 수장이 두 사람이나 되는 교황권의 갈등양상이 나타나서 공동체의 균열이 있었다. 교황권의 절대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교황선거의 부패상과 교황 주변의 추문들은 새로운 사회를 갈망하는 강력한 흐름을 만들어냈다. 영국의 위클리프가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려 했으나 금지 당했다. 보헤미안 후쓰는 교황권에 저항하다가 화형을 당했다. 여러 지역에서 로마가톨릭에 저항하는 여러 흐름들이 변화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으나,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기존 질서의 허망한 속내를 파헤쳤다. 종교개혁의 첫 세대는 엄청난 박해와 오해가 난무하는 가운데, 종교적인 관행과 사회적인 관습을 혁파하는 개혁을 감행했다. 독신주의를 철폐하고, 새로운 세상으로 개혁하는 변화의 상징이 바로 성직자들의 결혼이었다. 루터가 성직자로서 처음 결혼한 사람은 아니다. 비텐베르그에서 그의 동료들이 먼저 결혼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하면, 루터와 종교개혁자들은 사회 혁신을 일궈낸 인물들이었다.
결혼을 금지하고, 독신주의와 금욕주의를 강조한 것은 중세 로마가톨릭교회가 율법적인 구원론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오해하고, 곡해하였던 것이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그리스도는 어두움의 권세를 이기신 승리자이다. 에덴동산에서 실패한 아담으로 인해서 사망이 왔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생명과 부활이 주어졌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는 사람이 생각하던 모든 것들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길이다. 반대로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에 따라서 모든 행위를 유지해 나간다면 구원을 얻게 되리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람의 행위와 선행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는 값없이 주신 믿음으로 인해서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성도의 것으로 전가 받는다고 가르쳤다.
수도원의 독신주의와 금욕주의가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루터는 철저히 파헤쳤고, 모범적인 결혼생활로 입증했다. 독신주의와 금욕주의 등 엄격한 생활 규칙만으로는 사회적으로도 유익한 봉사를 할 수 없다는 것을 깨우쳤다. 비텐베르그 어거스틴파 성직자들과 동료 교수들이 결혼식을 올리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났지만, 루터는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1521년에 보름스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를 당했기에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독일에서는 농민들의 반란이 확산되고 있어서, 혼란스러웠다. 여성을 유괴하는 것은 법으로 금지하고 있었지만, 수녀원에서는 많은 여성들이 사라지고 있었다.
마틴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한스와 마가렡 루터 사이에서 아이스레벤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다시 이 도시의 통치자들과의 사이에 빚어진 마찰을 해결하고자 돌아오게 되었는데, 마지막 설교를 한 후에 건강악화로 쇠약해져서 1546년 2월 18일에 생애를 마쳤다.
<계속>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교수
개의 댓글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