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의 통제에서 벗어난 한국교회

7월은 법의 달이다. 한국교회가 법과 질서를 가장 많이 지키지 않는다는 지적의 목소리가 높다. 또한 교회의 재산이 많아지고, 기득권세력의 횡포가 끝을 보이지 않으면서, 교회분쟁이 갈수록 증대되고, 세상 법정의 문을 두드리는 일이 유행처럼 되어버렸다.

목회자와 교인, 원로목사와 담임목사, 기득권세력과 비기득권 세력 간의 다툼, 목사측과 교인측간의 갈등, 교단과 교회간의 다툼 등등 사랑과 화해의 공동체인 교회가 갈등과 다툼의 온상처럼 비쳐지고 있다. 이러한 다툼은 교회성장에 저해되는 원인이 되고 있다.

또한 교회내 다툼은 교회 내에서 해결되기보다는 사회법정의 개입으로 마무리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미 한국교회는 내부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자정능력을 상실했다. 여기에다 한국교회의 목회자와 교인들은, ‘성서의 법인 하나님의 법’과 인간의 삶과 가치를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세상의 법’을 지키거나, 실천하려는 의지가 부족하다.

그래서 교인들이나, 세상 사람들은 법과 질서를 지키지 않는 사람이 목회자이며, 교회라고 주저하지 않고 말한다.

본지는 7월 법의 달을 맞아 첫 번째 한국교회와 목회자, 교인들의 준법정신을 점검하고, 두 번째 구약성서에 나타난 법정신, 세 번째 예수님의 법정신을 다시 한 번 조명, 법과 질서를 지키는 교회의 새 모습을 제시하고, 교회 내에서 일어나는 분쟁이, 성서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찾는데 목적을 두고, 한 달 동안 특집을 기획했다.

특히 교회와 목회자, 그리고 교인들은 법과 질서를 지키지 않으면서, 법과 질서를 가장 많이 강조하는 모순을 지적하고, 법이 누구를 위해서 있는가를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 ‘법의 달 특집’의 목적이다.

한국교회의 목회자와 교인들이 법을 지키지 않는 현장은 교회건축의 현장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교회 내에서 일어나는 분쟁 대부분이 끝을 보이지 않는 것은 교회가 맘몬에 빠져, 가진 것이 너무 많아 그것을 쉽게 내려놓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부목회자들은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교회내규를 비롯한 규칙, 심지어 헌법까지도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고 있다.

많은 중대형교회 분쟁에 휘말려

분쟁에 휘말려 진흙탕 싸움의 끝이 보이지 않는 교회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사랑의교회, 강북제일교회, 두레교회, 효성교회, 성석교회, 성락교회, 제자교회, 광성교회, 인천주안장로교회, 목양교회, 영동중앙교회 등 한국교회 내로라하는 교회들이 교인들과 목회자, 교인과 교인, 담임목사와 원로목사 간의 ‘내홍’으로 인해 신음하고 있다.

수많은 교회가 갈등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사이 교회는 갈수록 사회적 공신력을 잃어버리고 있다. 사회적인 영향력도 크게 상실한 나머지 교회와 목회자의 신뢰도는 바닥을 치고 있다.

또한 기독교선교의 가장 큰 가치인 전도의 문은 신뢰도가 떨어지는 만큼 좁아지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를 사랑의 공동체로 인식하지 않고 있다.

자기들끼리 싸우는 이상한 집단, 자기들만 아는 이기적인 집단, 거짓말을 일삼는 비도덕적인 집단으로 인식하고 있다. 교회에 아무도 희망을 걸지 않는다.

이것은 기독교가 교회내 기득권자, 정치꾼, 가진자들에 의해서 종교로서의 가치를 상실했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오히려 분쟁으로 상처를 받은 교인들이 떠난다. 아니 스스로 기독교인임을 부인한다. 그리고 교회를 떠나 휴면상태에 들어간다. 그래서 한국교회를 걱정하는 목회자와 신학자, 그리고 교인들은 여기에서 멈추고 돌아서라고 한다.

더 이상 교회분쟁을 방치한다면 복음전파에 상당한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 뻔하다. 가뜩이나 교인들이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의 교회의 탈법과 분쟁은 기독교선교의 방해만 될 뿐, 하나님나라에 대한 희망은 없다. 이들이 바로 적그리스도이다. 그래서 여기에서 멈추고, 성서로 돌아가 예수님의 법정신과 구약성서의 법정신을 이 땅에서 실현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나라를 실현하는 것이 아닌가(?) 빽 없고, 힘없고, 미련하고, 가련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아펜젤러의 말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소개한다.

“한국인들은 교회의 생쥐들처럼 가련하고, 개들처럼 게으르고, 돼지들처럼 더럽고, 늑대처럼 탐욕스럽고, 그들은 것의 일하지 않고 쉰다. 그러면서도 이들에게는 칭찬할 것이 있다. 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갈구한다. 그들은 그들이 오랜 잠에서 깨어나려고 노력함에 있어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을 느끼게 한다”

이 말은 조선의 백성에게 있어 얼마나 수치스러운 말인가. 아펜젤러를 비롯한 조선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이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이들은 이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며, 성서에 나타난 법정신에 따라 천박하고 가난한 조선의 백성들의 권리를 찾아주기 위해서 여러 모양으로 노력했다. 여기에 영향을 받은 조선의 백성들은 일본식민지세력에 항거했고, 수명을 다한 이씨조선을 향해 개혁을 요구했고, 남녀평등의 사상을 구현했다.

이것이 바로 한국에서의 기독교의 가치이며, 오늘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몰각한 한국기독교가 체면을 유지할 수 있는 원동력이다.

분명한 것은 교회 분쟁의 이면에는 돈과 권력(교권), 명예와 쾌락을 쫓는 목회자와 교인들의 탐욕이 자리 잡고 있다. 대다수 교회 분쟁이 농어촌교회나 도시의 미자립 교회가 아닌 돈과 권력, 명예를 가진 대형교회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바로 한국교회의 현주소이다.

또한 대형교회 목사가 비자금을 형성, 이 비자금을 관리하던 장로가 죽임을 당했다.

또 법으로 엄하게 다스리는 목회자의 성추행, 성폭행 사건이 심심찮게 발생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으면서, 애굽에서 종살이하면서 처절하게 당했던 자신의 백성을 기억하며, ‘간음하지 말라’고 했다.

그렇다 성서의 법정신은 가난하고 소외되고 힘없는 백성을 지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중세교회를 닮아가는 한국교회는 그렇지 못하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교회내에서 이제 가난하고, 힘없고, 빽 없고, 천박하고, 사회적 약자들이 설자리는 없다. 그것은 교회가 성서의 법정신을 상실하고, 맘몬과 바벨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분쟁, 하나님나라 선교의 현실적인 도움 안돼

분쟁 이면에 숨겨진 탐욕과 욕망

사실 시골의 노인 몇 명이 출석하는 조그만 교회나, 혹은 교인들이 몇 안 되는 도시의 미자립교회가 분쟁에 휘말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반면 도시의 대형교회들 중에는 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교회가 적지 않다. 대규모의 부동산 등 수많은 재산을 두고 분쟁이 야기되는 사례, 교회 주변이 재개발 구역으로 선정되면서 땅 값 상승으로 인해 분쟁이 발생하는 경우, 교권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한 담임목사의 자리를 두고 분쟁이 발생한 사례 등등을 보면, 이것이 하나님의 교회인가(?) 의문을 갖게 한다. 한마디로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자리를 인간이 빼앗아버린 나머지 사이비종교집단으로 변질되고 있다.

또한 담임목사의 자리를 아들이나 사위 등에게 세습하려다 분쟁이 벌어지는 경우, 담임목사가 재정 의혹이나 성추문 의혹 등 윤리도덕적인 문제를 저질러 갈등이 시작되는 사례 등이 교회 분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시쳇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세속적인 욕망인 돈과 권력, 명예와 쾌락의 노예가 되어 서로 물고 뜯는 ‘이전투구’를 벌이는 모순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분쟁 담임목사에 의해서

교회 분쟁이 발생하는 일차적 책임에 대해 담임목사의 잘못이 크다는 지적이 강하다. 특히 담임목사와 관련된 재정관련 문제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재정운영과 관련한 문제가 여전히 교회분쟁의 주가 되고 있는 것은 공동의회나 제직회를 통해 집행과정이 투명하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드러났다. 교인들의 기대와 요구는 증대되고 있는데, 불투명한 운영으로 인해 교회재정에 대한 의혹만 증폭되고 있는 셈이다. 목회자가 최소한 교인들이 드린 헌금이 ‘하나님의 헌금’이라고 생각했다면, 이러한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우스운 것은 이러한 재정운용의 문제가 불거지자 일부 교회에서는 십일조로 교인의 자격을 제한하거나, 교인들의 재정열람을 제한하는 등의 ‘정관’을 개정했다. 이에 대한 교인들의 우려는 더욱 높아지고 있다. 한마디로 한국교회도 돈이 있어야 교회에 다닐 수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런 정관개정을 위한 세미나도 개최한다. 담임목사 중심의 정관개정을 통해, 담임목사에게 반기를 드는 교인들의 목소리를 잠재우고, 분쟁의 불씨를 꺼 버리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 내 권위주의를 강화하고, 공동의회란 교회의 민주적인 체계와 질서를 무력화시킬 가능성도 높아 한 개인에게 교회의 운명을 담보한다는 점에서 민주적인 정관도입이 시급하다.

그렇다고 교회 분쟁의 책임이 담임목회자에게만은 아니다. 한국교회가 오늘과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은 일차적으로 일부 목회자들의 책임이 크지만 무조건적으로 이에 편승하는 교인들 역시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안타까운 것은 교회 분쟁의 대부분이 교회법의 테두리 내에서 해결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유행처럼 사회법정으로 확대되고 있다. 특히 교회분쟁이 사회법으로 몰고 갔을 때는 이미 막장에 온 것이나 다름없다. 또한 교회분쟁은 사건 하나로 끝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사건에 사건이 꼬리를 물어 끝을 보이지 않는다.

일단 교회의 분쟁이 시작되면, 교회는 사분오열돼 생사를 건 사투에 돌입한다. 서로가 물고 뜯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연출된다. 서로에 대한 비방과 욕설, 폭력은 물론이고, 교회법과 사회법에 의한 소모적인 법정공방까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 상대방을 제거하기 위해 혈안이 되고 있다. 한마디로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라고 말하면서, 원수가 된다. 이들에게는 피도, 눈물도, 용서도, 사랑도 없다.

오늘 한국교회는 분쟁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것도 문제지만, 이 분쟁이 십중팔구 교회법의 범주 안에서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 사회법정으로 확대되고, 분쟁이 재생산돼 최소 몇 년을 끄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변호사만 좋은 일 시킨다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헌금이 법정소송비용으로 새어 나간다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한국교회는 일반인에게 좋은 모습으로 비쳐지지 못하는 것은 물론, 성서의 법정신인 이웃을 돌볼 겨를이 없다.

그렇다. 교회 분열과 갈등은 이미 위험수위를 넘어섰다. 교회의 존재 이유에 대한 상실감마저 불러오고 있다. 게다가 교회 분열과 갈등의 과정에서 수많은 교인들이 상처를 입고 스스로 교회를 떠나고 있다. 심지어는 그리스도인이기를 거부하고 무종교가 되거나 천주교나 불교 등 타종교로 개종하는 사례도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한국교회가 ‘사랑과 평화, 생명과 정의의 영적 공동체’로서의 모습을 상실하고 있음을 여과 없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는 한국교회의 본질적 사명인 ‘복음전파’에도 전혀 득이 될 것이 없다. 그것은 부정적인 한국교회의 모습으로 인해 교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세상 사람들을 점차 멀어지게 만들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공정성 잃은 노회와 총회 재판국

교회 분쟁이 십중팔구 사회법정으로 확대되는 데에는 공정성을 잃은 노회와 총회의 재판국이 단단히 한 몫을 하고 있다. 노회나 총회 재판국이 정치적 입김과 이해관계에 따라 납득할 수 없는 판결을 내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심지어는 하나의 사건에 대해 노회와 총회 재판국이 양 당사자의 대리인격으로 정면충돌하며 각각 상반된 판결을 하는 촌극도 벌어지고 있다. 이처럼 노회와 총회의 재판국이 각각 상반된 판단이나 해석을 하는 경우는 공정하고 정확하게 사건을 바라보지 않고, 돈이나 교권의 영향력 아래에서 사건을 다루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 분쟁의 당사자들이 처음에는 교회법의 테두리 안에서 해결책을 모색하다가 결국 사회법정으로 사건을 끌고 가는 것이 수순이다. 이는 노회나 총회의 재판국이 공정한 판결을 내려야 할 책임을 도외시하고 직무유기를 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교회 분쟁이 소모적인 장기전으로 흘러가고 결국 ‘승자도 패자도 없이 모두가 패자’로 남는 사태가 벌어지는 것도 교회법 안의 판단기관들이 원칙 없는 ‘갈지자 행보’로 일관성을 잃어버렸고, 판결에 대한 신뢰성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교회 분쟁에 대해 공명정대하게 시시비비를 가려할 할 노회나 총회 등 상위 기구들도 제대로 된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결국 교회 분쟁이 발생하면 교회법의 테두리 안에서 해결되지 못하고 사회법정으로 확대되는 악순환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 따라서 교회 분쟁의 책임은 단순히 담임목회자뿐만 아니라 성도들과 해당 교회가 속한 노회와 총회 모두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성서에 나타난 법정신을 존중하자

성경에는 세상 법정으로 가느니 차라리 손해를 보고 불의를 당하고 속는 편이 낫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이며, 자매이다. 형제간에, 자매간에 송사할 수 있는가. 고린도전서 6장 1절부터 8절을 보면 그것에 대한 해답은 분명해진다.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일이랴.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 구나 저는 너희 형제로다”

교회 분쟁이 발생했다 하더라도 이를 교회 내부, 교회법의 테두리 안에서 지혜롭게 해결할 수 있는 흔들리지 않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총회와 노회의 재판국의 독립성과 공정성이 절대 훼손되지 않도록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법과 원칙에서 벗어난 판결이 이뤄지지 않도록 재판국원의 자질을 철저히 검증하고, 혹여 재판에 영향을 미치는 돈이나 권력과의 연결고리를 철저하게 끊어내야 한다. 이럴 때만이 분쟁의 당사자들이 재판 결과에 승복할 수 있고, 해결의 실마리도 찾을 수 있다.

아울러 한국교회가 교회 분쟁을 줄여 나가기 위해서는 교회 분쟁이 발생하는 절대적인 빈도를 낮춰야 한다. 이는 목회자와 교인 모두가 올바른 기독교인의 자세로 돌아갈 때만이 가능하다. 돈과 교권, 명예와 쾌락을 탐닉하는 자세를 회개하고, 이를 버려야 한다. 교회는 목회자의 것도, 장로의 것도, 교인의 것도 아닌 하나님의 것임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아울러 교인들에 대한 올바른 교육과 이에 앞서 이를 실행할 수 있는 제대로 된 목회자의 양성도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 성서의 법정신을 교회가 존중한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임을 고백한다면, 한국교회가 소모적인 분쟁에서 해방돼, 성서의 법정신 아래 모두가 함께 예수님의 역사현장에서 하나님나라를 실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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