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탁 기 목사

예수님은 “무엇이든지 밖으로부터 들어가는 것이 그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마가복음 7장15절)고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교육했다.

예수님의 이 선언은 법의 한계성, 그것의 절대성을 주장할 때에 올 위험을 투시한 것이라는 것이 신학자들의 견해이다.

예수님께서 가장 문제를 삼은 것은, 사회적 약자와 가난한 사람들의 먹고사는 삶의 문제였다. 예수님은 이러한 입장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로 시작되는 산상수훈에 그대로 집약되어 있다. 초기 한국교회 역시 이를 따르려고 노력했던 흔적이 있다.

1893년 선교사협의회는 10개조의 선교정책을 발표했다. 우선 조선에서의 선교대상은 노동자계급을 상대로 했다. 그 후에 상류계층, 남자보다는 부녀자, 도시보다는 지방에서부터 전도운동 등을 골자로 한 선교정책을 채택했다. 그 결과 선교 20년 만에 25만 명이 하나님을 영접하는 놀라운 역사가 수명을 다한 조선말에 일어났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이러한 선교정책은 한민족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민족의 수난과 유리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민족의식을 자각한 한국기독교인들은 선교사들의 정교분리정책과는 상관없이 총궐기하여 3.1만세운동을 일으켰다. 3.1만세운동은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민족의식을 자각한 기독교인들이 총궐기한 민족운동이며, 독립운동이다.

당시 정교분리정책은 비겁한 자들의 자기방어의 방패가 되고, 안주하는데 악용됐다. 기독교인들이 민족의 수난과 유리된 채, 군살 같은 것이 되어 3.1만세운동과 같은 독립운동의 중심에 있었음에도, 우리민족과 관계없는 이질적인 종파라는 인상을 받고 있다.

이 같은 교회의 모습은 오늘에 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교회가 스스로 살려면 이 민족사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예수님의 법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한국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던 원인은, 가진 자들 때문이 아니다. 평생 사람대접을 못 받고 가난과 박해에 신음하던 민족교회에 몰려들어 성장했다는 사실을 부인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가 이 같은 정신을 잃어버렸다. 오히려 부자가 된 나머지 예수님이 거부한 예루살렘 성전과 같은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해 놓고,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백낙준 교수는 오늘 한국교회에서의 참교회와 참교인에 모습을 이렇게 정의했다.

“한국교회에 있어서 전형적인 교회는 시골교회이고, 그리스도인은 건강하고 열심히 일하는 정직한 농부이다”

하나님은 보잘 것 없는 떠돌이와 바로왕 밑에서 억압받는 이스라엘 민족들 속에서 구원역사를 시작했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속에서, 이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이셨다. 그래서 성서를 가난한 사람들의 책이라고 말한다. 성서에 나타난 법정신은 약자를 보호하는데 있다.

예수님의 법정신과 사역은 공생애 전체에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법을 내세운 자들은 법으로만 예수님을 제재할 수 없어지자 정치권력과 야합해서, 법이 법을 유린하면서 예수님을 십자가의 형틀에 처형했다는 사실에 그리스도인들은 주목해야 한다. 그 관점은 예수님의 수난사에 잘 드러나 있다. 이로써 예수님은 구약의 새 법전의 정신과 그 방향에 있어서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예수님은 법질서가 가난한 자와 사회적 약자들을 유린한다고 보고, 그것과 싸웠다.

오늘 한국교회는 이처럼 가난한 자와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법의 정신이자, 참교회의 모습이다.

그리스도교회협 증경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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