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 헌 철 목사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그를 배반할 수는 없다고 나는 다짐했다. 감방으로 돌아온 나는 이렇게 기도했다. “제가 이 감방에서 죽게 된다면 육체는 죽어도 영혼만은 더럽히지 않게 해 주시고, 만일 살아남게 된다면 육체는 감방에서 죽어 버린 것으로 생각하고, 제 심신을 당신의 제단에 오롯이 바친 제물로서 살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감방에서의 생활은 이 두 가지 기도 중에서 어느 것도 이룰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살아서 나간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또 영혼을 더럽히지 않고 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 안에 수감된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끝내는 변절하고 추잡해진 후에 죽어 가는 것이었다. 드디어 나는 결심했다. 마음이 약해지기 전에 스스로 죽어버리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곳은 자유마저도 없는 곳이었다. 결국 나는 완전 금식으로 저항을 하기로 했다.

닷새가 지난 후 의사가 검진을 왔다. 이튿날, 나에게 보석(保釋)이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꿈인지 생시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의사는 내가 심한 폐결핵을 앓고 있어 매우 위독할 뿐 아니라, 감방 동료들에게도 전염될 위험이 있다고 진단을 내렸다는 것이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8 . 15 광복을 맞았고, 오늘까지 나는 이렇게 살아남아 있다.

3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에게는 지금까지 지속하고 있는 이 일을 그만두고 좀 더 여유 있게 살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나는 꼭 한 가지, 그 회령 감방에서 되풀이하여 올린 기도만은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이미 그 때, 나는 죽음을 당했을 사람이었는데, 기적같이 살아나지 않았는가! 그 때 죽었다고 생각하고 보면, 나는 28년을 덤으로 산 것이다. 현재 이렇게 살아남아 일한다는 것만도 얼마나 눈물 나게 고마운 일인가?

극도의 물질적 빈곤(貧困)으로 허덕일 때면, 나는 차디찬 냉돌 위에서 가족과 함께 대 두박을 끓여먹던 생활을 마치 천국(天國)같이 생각하던 감방에서의 생활을 떠올려 보곤 했다. 그러면 빈곤은 곧 아무것도 아니었다. 빈곤이라 항상 상대적인 것이다. 나보다 더 잘 살는 다른 사람과만 비교하지 말고, 딴 사람이 아닌 나의 어려웠을 때의 생활을 생각하면, 그것은 빈곤이 아닌 것이다. 생각건대, 자유 없이 살 수 없는 체질과 사상을 가진 내가 끈덕지데 주어지는 어려운 상황에 적응해 가며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 때 그 날들을 생각하며 살아 왔기 때문이다. 근 30년 전의 그 날들이 내게는 항상 새로운 결심과 삶의 용기를 북돋워 주는 크나큰 계기가 된 것이다.(출처 : TV중학 1-1)

그분의 신학적, 정치적, 사회적 문제 등에 대해서는 일단 덮어두자, 단 강 목사님이 일제의 회유에 굴복하지 않고, 일제의 앞잡이가 되지 않음으로 “그 영혼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사실만은 기억하자. 그와는 반대의 삶, 곧 신사참배와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호의호식했던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해방 후에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빨갱이’라는 누명을 씌운 일들이 있지 않은가? 왜 그랬을까? 필자는 ‘박열’이란 영화에서 ‘빨갱이’라는 말이 일제가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 들에게 사용했었음에 놀랐다. ‘빨갱이’라는 말은 북괴의 남침 이후부터 사용 된 것으로만 알았던 필자로서는 순간 혼란에 휩싸였다. 다행스럽게도 일제가 ‘빨갱이’라고 지목하여 온갖 고문 등을 감행해왔으나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던 ‘박열’(朴烈, 1902년 2월 3일 ~ 1974년 1월 17일, 본명 박준식(朴準植) 한국의 ‘독립운동가’)은 그의 사후인 1986년에서야 대한민국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追敍)했다. 그의 고향인 경상북도 문경시의 생가 터에 그를 기념하는 기념관이 건립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는 그를 알지 못하고 살아왔다. 강원용! 박열(박준식)! 등 그들은 왜 그렇게 살아야만 했을까 ~

그 잔해는 자기 머리로 돌아오고 그 포학은 자기 정수리에 내리리로다(시 7:16)

한국장로교신학 학장•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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