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헌철 목사
프랑스 제독이자 종교전쟁 초기 위그노파의 지도자, 1562년 프랑스에서 종교전쟁이 일어나자 콩데공 루이 1세와 함게 프로테스탄트, 즉 위그노파의 거두가 되어 프로테스탄트 진영을 통솔하였다. 젊은 왕 샤를 9세의 신임을 얻자 영국과 함께 스페인과 싸울 것을 진언하였으나, 전쟁을 원치 않는 모후 ‘카트린드 메디시스’와 ‘기즈’ 공에 의해 1572년 8월 23일 성 바스톨로메오 대학살이 감행되었고, 콜리니도 자객의 습격을 받아 죽었다.

위그노파 의 수장인 드 콜리니는 1569년 프랑스 구교도와의 전쟁에서 패했다. 고귀한 귀족 신분의 콜리니는 장 칼뱅이 주도하는 프로테스탄트의 추종자였다. 장 칼뱅은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에게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것이며, 그 나라의 최상층에는 루터파의 성직자와 교육자가 있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많은 귀족들과 국민들이 칼뱅교에 젖어있는 반면 이런 신권 정치는 나라를 통치하던 왕실의 뜻에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 밖에도 칼뱅교는 수백 년 동안 쌓아온 카톨릭교회의 부와 부패를 비판했다. 그렇게 된 이상 유혈 사태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파리에서“‘성 바스톨로메오의 밤” 사건이 발생했다.

그로 인하여 프랑스 수도 파리에서 약 3000명의 위그노 교도들이 죽음을 맞았고, 전국적으로는 그 수가 무려 열 배가 넘었다. 프로테스탄트들의 세력을 몰아내려는 비열한 학살의 주도자는 왕의 어머니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였다. 그 때 콜리니는 해군 제독에서 공식적으로 은퇴하여 조용히 은거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학살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되었다.

늦은 밤 파리에 있는 콜리니의 저택을 습격한 살인자는 독일 용병이었다. 당시 콜리니는 안락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그는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하나님을 찾는 자, 즉 욥에 관한 칼뱅의 글을 읽고 있었다. 콜리니는 살인자에게서 교만한 살의를 느끼자 이렇게 말했다. “젊은 이, 당신은 나의 삶을 단축시키는 게 아니라오, 왜냐하면 죽음은 새로운 삶으로 향하는 문이기 때문이오.” 그러나 살인자는 이 해군 제독을 칼로 재빠르게 그의 머리를 베어 버렸다.(출처 : 유언)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죽음에 대하여 말하기를 “천국의 지점에서 본점으로 이주, 지상에서 천국으로의 이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짐 등”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가스파르 드 콜리니’의 유언에서부터 전해 내려오지 않았는가하고 생각해 보게 된다. 한 사람의 신앙에 있어서 신분의 높고 낮음을 떠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정절을 지켜나가는 것이 그리 간단치 많은 않은 것이기에, 수많은 사람들의 변절과 배반을 기록해온 교회사에 ‘콜리니’ 같은 순교의 길을 마다하지 않았던 이들이 있었기에 그나마 큰 위로를 받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 때문일까 작금에 이단자들이 제도권 안으로 돌아오는 소식이 속속 전해지고 있음에 안도의 숨을 쉬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려를 저버릴 수가 없음은 사랑이 없는 탓일까? 과연 그들이 온전히 변화 된 신앙으로 과거의 자신들의 잘 못 된 것 들을 송두리째 내려놓는 회개가 있음일까? 내려놓으면 무엇을 내려놓는 것일까? 부귀공명(富貴功名)? 그동안 잘못 된 길로 인도하고 잘못된 길에 빠지게 했던 것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으로 모든 것을 내려놓음일까? 아니면 잠시 숨고르기를 하기 위함일까? 물론 개혁주의는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들을 품에 안아야 하는 것이라 하였기에, 그동안 한국교회의 제도권의 지도자를 자처하던 이들은 역시 사랑이 넘쳐 나는 신앙으로.....?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숭배 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계 22:15).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