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명 찬 목사

1920년대 영미 선교사들은 민족의 새로운 시각을 봉쇄했다. 대신 기독교 변호에 급급했다. 당시 선교사들은 사회주의 사상의 동태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본국에 보낸 선교보고서에 의하면, “청년들이 읽는 잡지들은 ‘진보된’이념들 혹은 공산주의 이론들로 가득차 있다. 기독교 교리들이 문제가 되고 있으므로 한국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변호론’이다”고 보고했다.

1926년 감리교 선교사의 보고도, “기독교에 대한 비판의 대부분은 공산주의 영향에 의해서 제기되고 있다”고 했다. 이러한 기독교의 변호론적인 보고는, 한국의 기독교가 위협을 당하고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역으로 한국교회가 마음을 개방하여 참과 거짓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글라크는 선교보고에서 “러시아로부터 유래된 사상들은 경제적 압박을 의식하는 많은 사람(경제적 상위층)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이것은 식민주의 지배자측과 결부된 기독교 선교를 전제하고 있는 관저이었다. 당시 언론들은 연속적으로 유물론을 소개하고, 기독교를 비판했다. 양주삼 목사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교회는 위급한 시기에 직면해 있다. 사람들의 기독교에 대한 일반적 태도는 이전과는 다르다. 찬양하기 보다는 비판적이다”고 했다. 선교사측의 보고와 경종은 오늘날까지 서양 혹은 세계기독교의 입장을 반영하고 있다. 영미기독교의 입장은 오늘 한국교회 목회자들에게 그대로 전수돼, 개인적인 구원만을 강조하는데 급급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한국기독교는 서양의 이러한 문제를 넘어설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대위는 1924년1월2일부터 13일까지 <기독신보> 사설에 “기독교가 현대 자본제도에 대하여 마땅히 취할 태도‘, ’사회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본질‘, ’막스 이상으로 자본주의의 해악을 책하셨으리라‘ 등의 제목으로 7회에 걸쳐 실었다.

이 사설들은 일본제국주의 식민지체제와 영미의 세계질서 기존체제를 옹호하는 기독교와 그 죄의식의 문제점, 즉 사회적 죄를 의식하지 않는 문제점 등을 지적했다. 그리고 같은해 10월15일자 “기독교와 사회‘란 제목의 사설에서 참기독교와 참사회주의의 합일성을 주장했다.

“진정한 사회주의는 참말 교회로 더불어 서로 배치되는 것이 적고 교회를 위하여 준비하는 것이라 … 만일 진정한 사회주의자가 있으면 비록 기독교인 아니더라도 나는 그를 기독인과 동일히 간주하겠다”

1926년 미 선교사들의 비행이 폭로되고, 반선교사운동이 표면화되었다. 이 때부터 교회는 일본 식민지 아래서 고난 당하던 ‘동포사랑’에 대한 중요성이 제기됐다. 또한 금주운동과 공창폐지운동 등의 사회운동이 강조됐다. 금주운동과 공창폐지운동 등의 사회운동은, 이 문제가 세계 식민주의의 세력 아래서 자본주의적 경제구조와 식민주의적 착취구조의 일부분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대위는 <청년>지를 통하여 일관되게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상호보충성을 논했다. 그는 기독교와 사회주의 사상은 상통한다고 했다. 그리고 ‘민족교회론’을 주창했다. 이대위는 한반도에 세워진 교회는 ‘부용교회’, 즉 외국 각색종파의 전교에 의해서 세워진 외래종교라는 것이다.

이러한 기독교는 한반도의 신문화운동에 적합하지 않고, 사회의 타격을 받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기독교의 기본문제로 △민족자각의 결여 △문화부흥의 도외시 △윤리변혁에 민첩하지 못함 △사회개혁을 시도하지 못하고 개인구원에 매몰 등을 꼽았다. 그리고 기독교의 이상과 사회주의 실행을 종합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 양자는 평민운동의 중심이 되어야 하며, 이박에도 생산의 불평등, 분배의 불평등, 소비의 불평등, 분배의 불균등‘ 등을 지적하면서, 마태복음 19장23-24절의 말씀을 인용,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경제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영미 이데올로기적며, 관념적인 제국주의 신학과 신앙을 그대로 받아들인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귀에는 이대위의 종교사상과 민족교회운동, 그리고 교회의 사회참여와 집단적 구원이 제대로 들올 리가 없었다.

예장 한영 총무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