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 재 형 목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알 때 그분을 신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분은 확실한 분이십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마땅히 믿고 뛰어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십자가 보혈의 은혜와 부활에 대한 영광과 살아계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빼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순히 교회출석이 믿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교회에서 친구가 없다, 대화할 대상이 없다, 라고 고민합니다. 물론 친구가 필요하긴 하지만 우리의 신앙의 목표와 대상은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그분께 대한 신뢰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한 때에 주님께선 우리 삶 가운데서 그의 살아계심을 나타내 보이십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온 믿음의 인물들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삶을 통해서 자신의 살아계심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시대에 살아가든 자신을 신뢰하는 자에게 자신의 살아있음을 나타내 보이겠다고 약속하셨고, 나타내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선진들의 삶을 보게 되는 것이며. 그들의 삶을 통해서 그들의 믿음이 옳고, 삶이 옳았다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공주의 아들의 칭함을 거절하고 노예 생활을 한 모세는 불행한 사람이었습니까?, 늙어서 갈 곳을 알지 못하고 고향을 떠난 아브라함이 불행한 사람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살았던 모든 사람들의 삶이 결코 불행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복을 받고 누리며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불행한 사람은 바로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이 불행한 사람인 것입니다.

하루는 하나님께서 사단 앞에서 욥처럼 나를 순수하게 사랑하는 자가 없다며 욥을 자랑했습니다. 그때 사단은 욥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많은 것들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허락하심 아래 욥의 믿음을 시험하였고, 욥은 하루아침에 모든 자식과 재물을 잃었으며, 온몸에 종기가 나서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때 아내는 그에게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고 취하신 이도 하나님이시라, 내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으니 어려움을 당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를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사업이 잘되고, 집안이 잘되고, 건강할 때는 하나님을 자랑하지만 어려움을 만날 때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면 내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 며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 말은 곧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약시대의 사람이며,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믿음의 선진들은 구약시대의 사람입니다.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열악한 환경 가운데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섬기며 살았는데, 오늘날 우리는 더 많은 증거와 더 나은 약속들을 가지고 있음에도 신뢰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들은 많은 증거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구약의 성도들처럼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이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하나님은 나에게 최선의 것 이외에는 주시지 않는다는 인식하에 내가 당하는 믿음의 시련들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강한가, 혹은 약한가, 얼마나 깊은 믿음인가 혹은 얕은 믿음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은 바로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인내입니다. 이 인내는 믿음의 시련을 통하여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복을 주실 때에는 언제나 믿음의 토대 위에 세워 주십니다. 이 말은 믿음을 보시고 상급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이 믿음을 보시는 척도가 바로 인내인 것입니다.

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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