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 종 문 목사

감리교 선교사 헐버트는 1905년 한일 을사조약을 계기로 외세들의 한국 침략을 인식했다. 그리고 헐버트의 한국에 대한 인식도 많이 달라졌다. 한국인 보다도 한국을 사랑하게 됐다.

헐버트는 “로마 카톨릭 선교사들의 입국과 함께 외국 종교가 정치적 음모를 위한 가면에 불과하다는 두려움이 퍼지기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은 일본이나, 중국 이상의 은둔국은 아니었다”고 했다.

은둔국이라는 것은 서양 자본주의 시장개척의 팽창주의를 반영하는 것이다. 미국 해군본부는 한국과 통상조약을 맺으려고 한국 조정과 최초의 접촉을 시도했다. 1866년 3월 미국 배가 부산에서 파선하게 되었을 때, 한국인들은 조난당한 미국인들을 관대하게 대해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언론들은 “주민들이 거대하고, 그들의 힘은 헤라크라스에 비할 만하고, 그들의 사나움은 호랑이 보다 좀 못하다고나 할 까 하다”고 보도했다.

1866년 5월에 또 다른 미국 배가 평양 앞바다에서 난파 했다. 역시 한국인들은 난파자들을 관대하게 대하여 주었다. 그런데 1866년 7월 한국에 온 제너널 셔먼호는 총기를 비롯하여 화약 등 금지품을 싣고 있었다. 이러한 무기는 힘없는 한국의 백성들을 위협하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외세에 대한 한국 방어는 여지없이 무너졌고, 1882년 한미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리피스는 그 외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의식하고 있었으며, 그래서 미국이 한국을 위하여 특별한 책임을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우리의 외교가 한국의 문호를 개방하도록 했다. 한국을 세계시장으로 유인했다. 그리고 차관과 사회, 정치적 질병, 무질서를 끌어들였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이 신으로부터 받아 온 축복으로써 먼저 한국을 치유하고 축복해 주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을 “병 주고 약 준다”고 말한다. 어찌 미국을 치유하지 못하고 한국을 치유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미국인들이 받은 신적 축복이란 미대륙의 토착 인디언 족속들을 멸족시키면서 빼앗은 그 땅과 자원이 아니었는가. 그 축복이란 처음부터 지배자의 그것이다.

그것은 영적이란 생각 때문에, 세속의 욕심과는 무관하다는 환상 때문에, 한국에서의 기독교 선교는 근본적인 문제를 몰인식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인디언들을 멸족시키면서, 미국에 상륙한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와 민족의식을 희박하게 만들었고, 한국의 백성들에게 영적인 각성만을 촉구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추상적이고 감상적인 구원, 하나님나라를 강조했다.

청교도정신은 곧 앵글로색슨족의 그것이다. 그것이 미대륙의 인디언을 정복하고 개척한 위대한 정신이었다. 세계에로의 기독교 선교는 그것의 확대라는 사실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백낙준 교수는 “그 정신의 팽창주의가 세계에 대한 지배욕과 결부된 사실을 완전히 몰각하고서 ‘인류동생권에 대한 도덕적 책임의 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기독교선교, 한국교회 전반에 걸친 추상적인 윤리의식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고 지적했다.

하나님나라 선교는 미국 선교사들이 말하는 미대륙 인디언을 정복하고 개척한 위대한 정신이 아니다. 하나님의 의와 구원의 복음을 이 땅에서 실현하는 것이다.

예장 통합피어선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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