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재 성 교수

루터는 뜻밖의 사건에 연루되었고, 결국 계획에도 없었던 결혼을 하게 된다. 1523년 부활절 저녁이었다. 시토수녀회에 소속된 마리엔트론수녀원을 탈출하려는 여성들을 만나게 된 루터는 자신의 마차에 숨겨서 독신주의의 굴레를 벗어나 자유롭게 살아가도록 도와주었다. 구출된 수녀들은 모두 아홉 명이었는데, 그 중 여덟 명이 비텐베르그로 흘러 들어왔는데, 그 중 한 명만 남기고 모두 결혼하게 되었다. 아직 결혼하지 않고 남아있던 한 수녀는 암스도르프에게 소개해 주었고, 루터는 처음부터 전혀 결혼할 의사가 없었다. 로마가톨릭에서는 루터가 결혼하게 된다면, 마귀의 앞잡이라고 비난하려들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시도했던 결혼에 실패하게 되자, 루터는 잘 보살핌을 받은 것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고자 했다. 당시 이런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았던 비텐베르그 시청 교회의 목회자 요한네스 부겐하겐은 엄청나게 힘든 과정이었다고 증언하였다.

1507년에 루터는 신부로서 서품을 받았는데, 이 예식에 참석한 아버지는 여전히 화를 냈다. 십계명 중에서 5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으니, 아버지의 권유를 따라서 직업을 바꿔야만 한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뜻을 거역한 루터는 항상 마음이 무거웠다. 결코 아버지에게 반항하는 아들로 남고 싶지 않았다. 1508년에 비텐베르그대학에서 가르친 이후로, 그래서 당시 자신의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성직자들의 결혼 이야기들을 가지고 아버지에게 찾아가서 신속하게 상의를 드렸다. 그런데 아버지는 심각하게 결혼을 하라고 적극적인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에 따라서 루터는 갑자기 결혼식을 올렸다.

1525년 6월 27일, 42세의 신랑 루터와 26세의 수녀 카타리나 폰 보라 (Katherina von Bora)가 도시 중앙교회에서 예식을 올렸다. 그리도 두 사람은 똑같이 같은 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사망했다. 활기차고 잘 인내하며 매우 능력있던 카타리나는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낸 현명한 여인이었다. 후대의 개신교 목회자들이 영향을 받을 만한 모범된 가정생활을 꾸렸다. 두 사람은 여섯 자녀를 낳으며 매우 행복하게 살았고, 그 중에 두 명은 어려서 사망했기에 네 명의 자녀들 (막달레나, 폴, 엘리자베스, 한스) 만 생존했다. 그의 아내는 집안에 찾아오는 방문자들과 친구들과 학생들을 위해서 많은 수고를 감당하여 항상 식탁의 즐거움을 나눴다. 독신주의가 왜곡된 것임을 생활로서 입증했다.
 
<계속>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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