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근 열 목사

우리 민족의 해방과정을 다시한번 되새겨보며 그리스도인으로서 과거를 통해 현재와 미래를 열어가는 신앙의 경각심을 높여야 할 때다. 우리 대한민국의 해방의 역사는 세계 제2차 대전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1945년 미국은 일본에 두 개의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8월 6일에 일본의 히로시마에 1개의 원자폭탄을 투하하여 떨어뜨렸다. 또한 8월 9일에는 나가사키시에 나머지 1개의 원자폭탄도 떨어뜨렸다.

이것은 최초의 핵무기인 리틀보이가 일본본토 히로시마상공 580m상공에서 폭발하였다. 당시 미국은 히로시마 원자폭탄을 떨어뜨리기 전 약 6개월여에 걸쳐서 일본 67개 도시에 집중전략폭격을 가했다. 그리고 영국 중화민국과 함께 포츠담선언에서 일본에 대해서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으나 일본은 이것을 무시해버렸다. 결국 1945년 8월 6일 월요일 해리s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리틀보이가 히로시마에 투하 되었으며 3일 뒤엔 8월 9일 팻맨이 나가사키에 투하되었다. 히로시마 목표물은 이전까지 공습을 받은적이 없는 도시였고 당시 일본의 군사상 매우 중요한 일본군 제2사령부임과 동시에 통신센터이며 병참기지였던 것이다. 히로시마 원자폭탄은 티베츠 중령이 조정하는 B29에놀라게이는 2기의 동류공군기와 함께 티니안섬의 미 공공기지에서 출발하였다.

핵탄두는 비행중에 장착되었고 승무원들은 목표지점에 도달하기 30분전에 안전장치를 제거하였다. 일본은 3대의 공군기가 본토에 접근하는 것을 추적하고 공습경보를 발효하였지만 이처럼 소규모 편대가 위협이 위협이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곧바로 공습경보를 해제하고 방해전투기도 보내지 않았다. 그 결과 고도 9,750미터 상공에서 히로시마 원자폭탄이 투하되었고 이 원자폭탄으로 인하여 발생한 구름은 18km상공까지 치솟아 올랐다. 반경 1.6km이내의 모든 것들이 완전 파괴되었고 총면적 11㎢가 피해를 입거나 화재가 발생했고 모든 건물의 90%가 파괴되었다. 그 당시 히로시마에는 약 25만 5천명이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하는데 초기 폭발로 약 7만명이 사망했다.

투하 후 2~4개월동안 약 9만~16만6천여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그 후 방사능 피폭으로 오늘날까지도 사망과 질병은 이어지고 있다. 이후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약 4만명이 사망하였고 방사능 노출로 수천명이 추가로 사망했다. 당시 미군사령부는 히로시마원자폭탄 투하로 즉각 항복을 받아낼줄로 생각했다. 그러나 계획대로 안되자 상업도시이자 중요 항구역할을 하던 나가사키에 원자탄을 투하했다.

마침내 8월 14일 일본군은 항복을 선언했고 9월 2일에는 도쿄만에 상주하던 미주리호에서 항복선언문에 서명을 했다.

지금 우리 민족은 민족해방의 자유를 맘껏 누리고 있는가? 일본의 만행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돌아가며 망언을 늘어놓고 있는 관료들을 보자.

우리의 위정자들 가운데서부터 친일 세력을 제거해야한다. 이 일은 위정자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도 깊이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위안부 문제하나도 해결이 안되고 있으니 현실을 직시해야한다. 주님의 마음으로 이 민족을 바라보자!

우리 대한민국의 진정한 해방은 국민들 특히 그리스도인들의 애국심이 하나로 뭉쳐야한다는 점이다. 이권을 따지지 말고 진정한 민족의 해방을 위해 기도하고 좌니 우니 보수니 진보니 하는 싸움을 언제까지 할것인가? 이제는 한국교회부터 민족의 진정한 해방을 위해서 예레미야처럼 민족을 향한 눈물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민족해방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군남 반석교회 담임/ 본지 논설위원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