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가성 우물가의 이야기는 사마리아 땅을 지나가던 예수께서 우물에 물 길러 나온 여인에게 물 한잔 달라는 것으로 시작한다(요 4:5-26). 그러나 실제 이야기의 배경은 매우 복합적이다. 역사적으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원수가 되어서 상종 자체를 금기시 했다. 더구나 사마리아 여인은 순탄한 삶을 산 여인으로 보기 어렵다. 그런 여인을 상대로 유대인 남자가 먼저 다가가서 물 한잔 달라고 도움을 청한다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다. 그런데도 요한은 그 모든 것을 뛰어넘어 목마름이라는 자연적인 필요를 매개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여행길에서 육신이 목마른 사람과,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영혼이 목마른 이가 서로 엇갈리면서 아슬아슬하게 대화를 이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단순할 것 같은 대화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역사적으로 얽힌 문제, 종교적으로 얽힌 문제, 유대인인과 사마리아인의 갈등 등 본질적인 문제로까지 확대된다. 그리고 종당에는 바위처럼 단단한 문제들이 해체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요 4:24). 놀라운 말씀이다. 어디서 예배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예배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이라는 장소에 고박된 성전주의를 해체하고 각 사람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모시는 길을 열어주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세계 모든 인류가 각자 있는 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길을 열어주셨다.
이 사마리아 우물가의 이야기는 오늘날 남과 북의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지금 남과 북은 상대가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를 전면에 내놓고 서로 상대를 굴복시키겠다며 모든 에너지를 고갈시키고 있다. 피차 감정은 더 사나워지고, 국제적으로는 더 고립되고, 통일의 희망은 더욱 멀어지는 악순환을 계속하고 있다. 사실 오늘의 남과 북의 문제보다 더 풀기 어려운 게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얽힌 문제이다. 그런데도 요한은 그처럼 복잡한 문제를 ‘물 한잔 달라’는 것으로 시작해서 마침내 그 어려운 문제들을 풀어나가고 있다. 우리에게 그런 지혜가 없다는 게 참 슬픈 일이다. 얼어붙은 남북에도 서로를 향해 물 한잔 달라는 마음의 여유와 지혜가 있었으면 한다. 기적은 지극히 작은 것에서 일어난다. 하지만 지난날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조급하지 말아야 한다.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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