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 헌 철 목사

‘바라바’를 왜 테러리스트라 하나요? 바라바를 왜 살인자라 하나요? 마가복음 15장 7절, 누가복음 23장 19절, 25절, 사도행전 3장 14절 등의 말씀 때문에 그리 표현 하는가요? 사도행전 3장 12절-15절에서 사도 ‘베드로’의 증거는 그 방점이 ‘바라바’에 있지 않고 대제사장을 비롯한 서기관, 바리새인 등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죄악(罪惡)을 지적 하는데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당시의 유대의 역사적 사항을 고려하여 본다면, 우리가 일제의 36년 피압박 속에 있을 때, ‘안중근’의사 등 독립운동 가들에 대하여 매국노들이나 친일세력들은 무엇이라 했나요? 또한 일제는 무엇이라 기록 하나요? 그렇다면 우리가 설교 시 ‘바라바’가 테러리스트, 살인자이기에 절대 풀려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한다면, ‘맛사다’에서 최후를 마친 이들은 폭도들이라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다윗 왕 때의 영화가 회복되기를 열망하는 가운데 메시야를 기다리던 유대인들은 그리 받아 들였을까요? 그들이 ‘맛사다’의 비극을 잊지 않으려 몸부림치는 것은 왜 일까요?

또한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내려오실 수 있었다면 그리하셨을까요? 그들이 예수님을 살려준다고 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내려 오셨을까요? 예수님께서 구속을 위한 대속에 대한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함이시라면 예수님께서도 ‘바라바’를 풀어주기를 원하고 계시지 않았을까요? 아마도 ‘바라바’가 죽어야 예수님께서 사실 수 있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도리어 예수님께서도 ‘바라바’를 살려주기 원하시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기를 원하셨지만 침묵하셨을 뿐이 아닐까요? 예수님은 그리 될 줄 아셨기 때문이죠?(요19:30 참조) 다시 말하자면 유대인들의 외침은 ‘바라바’를 풀어주기를 원 했으나, 예수님께서도 예언의 성취를(요19:28-30. 행14;26-29. 요17:4-5) 위해 자신보다는 ‘바라바’를 풀어주기를 원 하셨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따라서 우리는 매국노(賣國奴)들, 정교유착자(政敎癒着者)들, 외식자(外飾者)들인 대제사장을 비롯한 서기관, 바리새인 등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죄악(罪惡)에 방점을 둔다면 ‘바라바’에 대하여 말 하는 것에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말씀과도 충돌을 가져 오지 않도록 하고, 그 해석에 있어서도 성경 외적인 함의를 고려하여 성경의 본질이 훼손 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물론 방점은 예수님에 대한, 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 등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악행에 있음으로, 유대인들 역시 ‘바라바’의 사면을 외쳤다 해도 그를 민족지도자 등으로 지지해서, 존경해서, 좋아 하는 등으로 풀어주기를 원하지 않았음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진정 그들이야 말로 매국노, 정교유착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매국적 정교유착 자들인 대제사장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이야 말로 살인자요, 테러리스트들인 외식자들 이지요. 따라서 로마의 압제 밑에 기생하여 사는 자들은 ‘바라바’를 살인자라고 테러리스트라고 할 수 있는 자격조차 없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바라바’를 사면하라며, 예수님을 십자가상에서 죽이라고 외친 정교유착 자들의 외침을 통해서도, 예수님의 대속을 성취하시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거두신 것”(출14장 참조) 을 생각 한다면, ‘바라바’를 살인자 테러리스트라는 등의 죄명을 거론 할 때, 우리가 일제 36년의 피압박 속에 있을 때의 독립운동가 등 애국지사들의 고통도 잊지 말고 주의를 기울여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로도 삼아야 할 것입니다.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벧전2:23)

한국장로교신학 학장•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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