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 종 문 목사

한국교회는 영미 선교사들로부터 물려받은 잘못된 기독교 이해를 더 이상 지향해서는 안된다. 이들이 가져다 준 식민주의적이며, 제국주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신앙과 신학을 한국적 상황에서 재해석되고, 한민족의 ‘구원의 역사’와 새로운 미래를 향한 도구로 삼아야 한다. 한마디로 히브리민족들 가운데서 역사하신 하나님, 그들과 함께 역사의 현장에서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이신 예수님을 고백해야 한다.

어떠한 형태로든지 한국에 전파된 기독교 선교에 함축된 복음의 보편성, 참다운 인류공생권을 실현시키는 보편성은 서양이나, 앵글로색슨족의 정신의 확대여서는 안된다. 이제 하나님 중심, 한민족의 중심에서 새롭게 추구되어야 할 과제이다.

1884년부터 1905년까지 헤밀튼의 한미관계연구는 일부 선교사들의 상업행위, 특히 알렌의 상업행위를 나타내 준다. 여기에서 알렌의 한미관계와 결부된 미국의 기독교선교에 대한 문제상황이 그대로 드러난다.

알렌은 선교 전초기지를 구축하기 위해 1884년 내한했다. 황실 고문관으로 일을 시작했고, 미공관의 외교관으로 한국에서 국책사업을 따내, 미국인들에게 매개했다. 알렌의 상업행위에 대해서 한국교회가 비판하지 않고, 호의적인 평가를 내리는 이유도, 그가 외교관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한국인을 대상으로 상업행위를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한국교회가 부인해서는 안된다.

알렌의 업적 중 가장 위대한 것은 아시아대륙의 가장 풍부한 광석을 가진 평안북도 운산 금광채굴권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미국에 독점권을 매개했다. 헤밀튼은 알렌이 운산탄광 채굴권을 미국에 매개한 것에 대해 “제국주의적 외교에서 가장 멋들어진 것 중의 하나였다”고 평가했다.

1939년 미국은 이 금광을 800만 달러에 일본인 회사에 매각했다. 미국은 40년 동안 900만톤 광석으로 1500만 달러의 이익을 보았다. 알렌의 상업행위는 한 개인의 행위였던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 당시 국제적인 상황에서의 기독교 선교는 선교의 동기에서부터 쉽게 상업행위로 옮겨갈 수 있었다. 알렌의 상업행위는 미국 자본주의 기술문명의 단적인 예증이다.

김원모는 “미국이 한국의 금광개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876년 즉 일본의 강압에 의한 한국의 개항 이전부터였다.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 이후, 미국은 또 함장 슈벨트에게 1867년 조선탑문항해를 명령했다. 그는 한국이 풍부한 황금매장량을 가졌다는 정보을 입수했다. 그는 황금개발에 대한 그의 관심은 조선개항계획을 추진시킨 ‘하나의 동인작용을 했다”고 평가했다.

슈펠트 다음으로 내한 한 코완 박사는 원산에 상륙, 제일 먼저 금광개발을 타진했다. 미국이 금광개발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883년 조선의 최초 외교사절인 민영익 전권대신 일행이 미국을 방문 했을 때부터였다. 알렌의 금광개발은 미국상품시장 진출의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알렌을 비롯한 선교사와 외교관들을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이데올로기에 물들여졌다고 비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알렌을 비롯한 선교사들도 미국의 자본주의 평창세력의 혜택을 받아서 한국에 왔기 때문이다. 또한 서양 자본주의적 팽창세력에 대하여 어두운 한국의 상황에서 연유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해서도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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