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란 강

강물은 몸에
하늘과 구름과 산과 초목을 탁본하는데
모래밭은 몸에
물의 겸손을 지문으로 남기는데
새들은 지문 위에
발자국 낙관을 마구 찍어대는데
사람도 가서 발자국 낙관을
꾹꾹 찍고 돌아오는데
그래서 강은 수 천리 화선지인데
수만 리 비단인데
해와 달과 구름과 새들이
얼굴을 고치며 가는 수억 장 거울인데
갈대들이 하루 종일 시를 쓰는
수십억 장 원고지인데
그걸 어쩌겠다고?
쇠붙이와 기계소리에 놀라서
파랗게 질린 강

▲ 문 현 미 시인
사람의 가슴에 강물이 흐른다. 은혜의 강물이 흐르기도 하고 슬픔의 강물이 흐르기도 한다. 때로는 분노의 강물이나 인내의 강물이 흐르기도 한다. 그런데 강도 사람처럼 감정을 지니고 있어서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며 심지어 놀라기까지 한다. 강이 놀라니 시를 읽는 독자도 덩달아 놀란다. 이렇게 시인은 무생물을 사람에 비유하여 의인화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강이 길다, 맑다, 넓다든지 있는 그대로 서술하는 것은 표현이라고 할 수 없다. 물론 시상 전개 과정에서 그렇게 서술하기도 하고 문학적인 형상화를 위해 다양한 수사적 방법을 동원하기도 한다. 그러면 강물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한 번 살펴보자. 강물이 사람으로 형상화 되어 그 ”몸에 있는 그대로의 자연, 즉 하늘과 구름과 산과 초목을 탁본“한다. 탁본은 나무나 금석 등에 새긴 문자와 부조를 종이에 모양을 뜬 것이다. 시에서는 강이 스스로 탁본을 하고 있다. 하지만 강이 직접한다기보다는 저절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데 시인이 상상을 함으로써 이런 아름다운 표현이 탄생한다. 상상은 점차 확대되어 모래밭이 자기 몸에 ”물의 겸손을 지문으로 남기“기도 하고, 새들마저 그 지문 위에 ”발자국 낙관“을 찍기도 한다. 강과 하늘과 구름, 모래밭과 새들도 여기에 사람까지 동참하여 함께 멋진 노래를 부른다.

시의 중반부에 이르면 강이 다시 새롭게 변주된다. 강이 화선지에서 비단으로 다시 거울이 되다가 나중에는 ”갈대들이 하루 종일 시를 쓰는“ 원고지가 된다. 참신한 발상과 탁월한 시행 배치로 인하여 강과 모래밭과 새와 갈대가 예술가로서의 자질을 한껏 발휘한다. 그런데 시의 후반부에서 놀라운 반전이 일어난다. 서정적 시상 전개를 막는 도전적 시행 ”그걸 어쩌겠다고?“가 나타난다. 그 이유는 ”쇠붙이와 기계소리“에 놀라서 ”강이 파랗게 질“리기 때문이다. 발전이라는 명목 하에 자연을 무분별하게 훼손하고 파괴하는 현상을 에둘러 비판한 시 한 편으로 눈부신 전율이 일어난다. 시인을 빚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손길에 절로 감탄하게 된다.

백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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