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 헌 철 목사

집에 돌아온 크산토스는 침실에 들어가 부인을 안고 키스했다. 부인은 크산토스를 매정하게 뿌리치고 등을 돌린 채 말했다. “저리 가세요! 다른 여자와 노닥거리는 것도 아니고, 암캐라니! 내 지참금이나 당장 돌려줘요.”

“무슨 그런 터무니없는 소리를! 이솝 이놈 이번엔 또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그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은 여자를 꼬드겨 당신 여자로 삼지 그래요.”

“이솝이 나를 필계로 또 한바탕 소란을 피웠다는 거군? 누가 가서 이솝을 불러오너라.”

‘이솝’이 들어오자 크산토스가 말했다. “이솝, 요리는 누구에게 주었느냐?”

“주인님은 ‘주인님을 사라하는 여인에게 가져다줘라’ 말씀하셨습니다.”

크산토스 부인이 말했다. “나는 아무것도 받은 게 없어요, 누구에게 가져다줘라 했는지 시치미 떼지 말고 말해요.”

“이런 괘씸한 놈, 부인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하지 않느냐?”

크산토스가 소리치자 이솝이 말했다. “음식을 누구에게 주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나를 사랑하는 여자에게 라고 했다.”

“누가 주인님을 가장 사랑할까요?” “이놈, 감히 주인을 가지고 놀 샘이냐?”

“주인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누군지 아셔야 합니다.” 이솝이 암캐를 불러 말했다. “이 개는 주인님을 사랑 합니다. 주인님은 마님을 사랑 합니다. 하지만 마님은 주인님을 사라하지 않습니다. 주인님은 부인에게 사랑받고 있다고 생각 합니다. 하지만 부인은, 그런 보잘것없는 음식을 탓하며 주인님께 지참금을 돌려달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주인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하지만 이 개는 껍질을 벗겨도, 죽어도, 맞아도, 주인님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자기가 당한 것을 모두 잊어버리고, 꼬리를 흔들며 주인님 품으로 파고듭니다. 주인님은 ‘나를 사랑하는 여자에게’라고 말씀하시지 말고, ‘집사람에게 이것을 가져다줘라’ 이렇게 말씀하셔야 했습니다. 주인님을 가장 사랑하는 여자는 부인이 아니라, 이 개이기 때문입니다.” 크산토스가 부인에게 말했다. “이제 알겠소? 내 탓이 아니라, 말꼬리를 잡힌 것이오. 어떻게든 구실을 찾아 저놈에게 매질을 하겠소. 꼭 보복해주겠소.”

평소 주인님 부인의 갑 질에 이솝은 마음의 상처가 매우 컸다. 그러나 이솝은 앙갚음을 하겠다는 극단적 행동 보다는 그때그때 지혜롭게 대처함으로 주인 내외를 궁지에 몰아넣곤 하였다. 그러나 주인 내외는 자기들이 당했다고 해서 이솝에게 억울한(거짓) 누명을 씌워 폭력을 가했다는 내용은 보이질 않는다. 당연시 되는 노예제도하의 주인과 노예의 관계인대도 말이다. 단지 이솝의 지혜에 주인 내외는 이솝을 어찌하지 못 했으며, 항상 궁지에 몰리는 쪽은 주인 내외였다니 현대의 우리는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까?.

작금에 대한민국의 화두는 단연 갑 질 논란이 아닐까 한다. 본사와 점주? 기업주와 기사? 점주와 알바? 심지어 군대에서 까지 상사와 하급자 간의 갑 질 논란 등까지 회자 되면서 국민의 감정이 그리 편치 많은 않다. 온통 자기만이 우위의 위치에서 온갖 혜택을 누리고자하며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자는 말은 쓰레기통에나 버리라는 사람들 때문일까? 가진 자와 못가진자가 존재할 뿐, 사람의 인권, 인격 등은 안중에도 없는 그야말로 갈등만 상존한다. 그러니 그 향유함에 손실이 왔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온갖 욕설, 비하, 폭력 등을 자행한다. 참으로 마음이 아프다. 분명한 것은 대한민국에는 노예제도는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 그러나 ~ ?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4:8).

한국장로교신학 학장•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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