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북한의 핵개발과 미사일개발을 매개로 군국주의 부활에 시동을 걸었다. 우리 민족은 36년 동안 일본제국주의에 아래서 고난을 당하며, 수모를 당한 경험을 잊지 못한다. 이같은 역사적 사실을 다룬 영화 <귀향>을 비롯한 <군함도>, <동주>, <박열> 등이 상영되고 있다. 이 영화들은 모두 한민족의 한을 그대로 드러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일제하에서 벌어진 역사적 진실들은 해결되지 않은 채 미완의 사건들로 남아 있다. 일본은 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우긴다. 정신대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는 굴욕적인 정신대 협상을 했다. 강제 징용자에 끌려갔던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다. 일본을 향한 반일감정은 높아만 간다.

이런 가운데 일본은 신무기를 개발하고, 수입해 온다. 그리고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로 변하고 있다. 평화헌법을 파기하고, 군국주의와 패권주의를 꿈꾸며, 전쟁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 이제 한반도를 둘러싼 중국, 일본, 러시아, 북한, 미국 등의 군비경쟁은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수명을 다한 이씨 조선말, 이 땅에서 패권경쟁을 벌인 러일전쟁과 청일전쟁이 일어났던 망령이 되살아난다. 일본군의 군화 발에 짓밟혔던 러일전쟁과 청일전쟁, 다시 이 땅에서 일본군의 군화 발이 활보하는 날이 다시 올까 국민들은 걱정한다.

여기에다 대한민국의 거리에는 일본차가 아무 제지를 받지 않고 질주한다. 일본차의 판매율이 20%에 육박했다는 보도도 나온다. 민족의 자존심이 구겨 질대로 구겨지고 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백주대낮에 대한민국의 서울 한복판에서 일본천황의 생일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차의 질주는 당연한지도 모른다.

이 생일잔치에 국민들이 뽑아준 국회의원을 비롯하여 기업인 등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는 보도는.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한민족의 자존심마저도 구겨버리는 범죄이다. 이것에 대해 정치지도자나, 교회지도자, 경제인들은 침묵하며, 일본 식민지 지배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국무총리 후보를 지지하는 성명서도 냈다는다는데 서글프다.

이들의 모습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대제사장과 율법학자,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권력의 주변을 맴돌며 가난한 사람들을 등쳐먹는 부호. 권력에 빌이 붙어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어렵게 만든 관리들의 모습은, 나라 없이 유리방황하며 고난을 당하던 사람들을 향해 ‘권력도 하나님으로부터 온다’고 말하며, 무조건 복종을 강조하는 이 땅의 지식인들과 비교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들의 잘못을 분명하게 비판하고,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나님나라를 선포했다. 그들과 함께하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들이 먼저 들어간다고 선포했다. 이 말은 분명 부자들을 향한, 아니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을 향한 경고였다. 한마디로 로마의 식민지체제 아래 있던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구체적인 구원의 응답이었다.

이 응답이 한국 땅에서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다. 한국개신교가 이 땅에 들어온지 130년, 그동안 한국개신교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축복’을 이야기 하면서, 피압박민족에게 희망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천박하고 쓰레기 같은 말로 민족 간의 싸움을 분탕질하고, 교회분열을 일삼았다. 또한 친일행각을 벌인 기독교지도자들은 과거의 잘못에 대해 회개 한번 않고, 세상을 떠났다. 이런 한국개신교가 국민들을 향해 교회에 나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일본의 게속되는 만행에 대해서 반박할 수 있겠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우스운 것은 일본의 만행, 군국주의 부활의 움직임이 일고 있는데도, 그것에 대한 심각성을 모른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지도자와 교인들은 ‘일본선교’라는 미명하에 아무 생각없이 즐기고 있다. 오늘 한국교회가 국민들부터 신뢰를 받지 못하고, 경쟁력을 상실하게 된 원인이 바로 민족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이지를 못한 결과이다.

한국개신교와 정치지도자들은 최소한 민족의 자존심을 구기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국민들도 스스로 이 땅의 거리에서 일본차의 질주만큼은 막아내야 한다. 그리고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벌판을 달렸던 선열, 일본군에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했던 이 땅의 아들과 딸들의 고난을 증언해야 한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한의 사제’로서, 이들의 맺힌 한을 풀어주고, 일제하에서 고난당한 사람들이 편안히 안식 할 수 있는 길을 활짝 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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