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 보 연 교수

오늘 카톡 방에 인정이 메마른 세상에서, 인간성이 상실해 가는 세상 속에서, 인정이 흘러넘치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올라 왔다. 스스로를 귀하게 할 수도, 천하게 할 수도 있는 이야기이다. 사람을 대함에 있어 외모로 판단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는 글이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은 오늘의 일상인지도 모른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공동체라면, 그 공동체는 생명을 다한 죽음의 공동체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미가 흘러넘치는 ‘인정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천대받고, 멸시당하고, 불구자, 떠돌이 등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함께 인정공동체를 이루셨다. 카톡 방에 올라온 <아빠 내가 소금 넣어줄게 … >란 제목의 글은 딸의 아빠를 향한 사랑, 효행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는데 이의가 없다. 그 줄거리를 눈물로 적어 본다.

얼마 전 순대국 집에서 순대국 한 그릇을 기다리고 있는데, 음식점 출입문이 열리더니 여덟살 쯤 되어 보이는 여자 아이가 어른의 손을 이끌고 느릿 느릿 안으로 들어 왔다. 누가 보아도 모녀 사이였다. 두 사람의 남루한 행색은 한 눈에도 걸인임을 짐작 할 수 있다. 조금은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주인아저씨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들을 향해 소리 쳤다

"이봐요 이렇게 손님이 없는데 다음에 와요"

아이는 아무 말 없이 앞을 못보는 아빠의 손을 이끌고 음식점 중간에 자리를 잡았다. 주인아저씨는 그때서야 그들이 음식을 먹으러 왔다는 것을 알았다.

"저어 아저씨 순대국 두 그릇 주세요"
"응 알았다. 근데 얘야 이리좀 와볼래"

계산대에 앉아 있던 주인 아저씨는 손짓을 하며 아이를 불렀다.
"미안 하지만, 지금은 음식을 팔수가 없구나. 거긴 예약 손님들이 앉을 자리라서 말이야"

그렇지 않아도 주눅이 든 아이는 주인아저씨의 말에 얼굴이 금방 시무룩해 졌다.
"아저씨 빨리 먹고 나갈께요. 오늘이 우리 아빠 생일 이에요"

아이는 찬 손바닥에 꽉 쥐어져 눅눅해진 천원짜리 몇 장과 한 주먹의 동전을 꺼내 보였다.
"알았다. 그럼 빨리 먹고 나가야 한다 "

잠시 후 주인아저씨는 순대국 두 그릇을 그들에게 갖다 주었다. 그리고 계산대에 앉아서 물끄러미 그들의 모습을 바라 보았다.
"아빠 내가 소금 넣어 줄께 "

아이는 그렇게 말 하고는 소금 대신 자신의 국밥 그릇으로 수저를 가져갔다.. 그리고는 자기 국밥 속에 들어 있던 순대며 고기들을 모두 떠서 앞을 못보는 아빠의 그릇에 담아 주었다.
"아빠 이제 됐어. 어서 먹어, 근데 아저씨가 우리 빨리 먹고 가야 한댔으니까 어서 밥떠. 내가 김치 올려줄께 "

수저를 들고 있는 아빠의 두 눈에는 눈물이 가득히 고였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주인아저씨는 조금전 자신의 행동에 대한 뉘우침으로 그들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했다.
이 글을 쓴 그 자리에 있던 손님은 그 아이와 아버지의 음식값을 같이 지불하고 식당을 나왔다. 필자는 이 글을 읽으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다. 장애를 가진 사람도, 가난한 사람도, 부자도, 세리도, 과부도, 죽임을 당한 자도, 떠돌이도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피조물이다. 때문에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

이 글을 읽으면서 스스로를 귀하게 할 수도, 천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했다. 사람을 대함에 있어 외모로 판단하는 것은 인정이 메마른 사회이며, 진정한 이웃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일상의 행동이 이 아이의 효행처럼 세상에서 좋은 빛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한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한없이 부족하고, 한없이 감사하다고 생각하면 한없이 감사하다. 더 못가짐에 불평하지 말고 덜 가진 이들을 돌아보며, 더 감사해야 한다.

굿-패밀리 대표/ 개신대 상담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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