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재 성 교수

2. 도시집약과 자본체제

종교개혁시대에 유럽의 경제체제는 완전히 전환점을 맞이하였으니, 도시지역에서는 정치적 자유도시들이 토대를 갖추었고, 소규모 자본주의가 발생하였다. 도시에는 사람들이 계속 유입하는 인구 집중현상이 나타났고, 주택부족으로 도시 물가는 엄청나게 상승했다. 인구가 갑자기 불어났기에 음식값은 6배나 올랐고, 목수와 노동자 임금은 두 배로 뛰었다.

독일 콜론이 가장 큰 대도시였는데 인구가 4만 명을 넘었고, 누렘베르그, 아우구스부르그, 울름, 스트라스부르그, 마그데부르그, 단지히, 비엔나, 프라하, 에르푸르트 등이 2만 명을 넘어선 대도시들이었다. 스위스 쮜리히와 베른 등은 6만 명 이상이나 되었다. 영국에서도 2백 7십만 명이던 인구가 16세기 말엽에는 4백 만 명으로 불어났다. 종교개혁의 여파로 영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바다를 건너 피신을 갔다. 유럽 대륙의 첫 관문이 되는 곳에 16세기에 갑자기 인구가 몰려들었으니, 벨지움의 항구도시 안트워프가 바로 그곳이다. 5만 명에서 10만 명으로 증가했다. 파리, 베니스, 밀라노 등 대도시 거주자는 20만 명 정도였다.

기본적으로 농업이 생업이던 시대가 근본적으로 바뀌게 되었는데 의복제조업, 제철소, 무기제작소, 소상업인들, 가내 수공업이 발전하면서, 신흥 부자들이 재물을 축적하게 되었다. 군주제 하에서 신분사회에 소속되어 살고 있던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가 변해가면서 많은 문제가 드러났다. 지주들은 이윤을 남기기 위해서 더 많은 농부들이 필요했다. 자신들의 권리주장에 눈을 뜬 농민혁명이 있었고, 농부들은 도시로 진출하여 자유로운 소상공인이 되었다. 루터의 영향으로 자유를 주장하는 기독교인들의 생각이 표출되었다. 권세자들과 정부에 대항하여 보다 급진적인 정치적 변화를 주장하는 농민들이 재세례파에 합류하면서 과격한 개혁사상이 널리 확산되었다.

3. 개인의 자유와 특권신장

유럽에서 사회적 관계가 변화되었고, 개인주의 사상이 팽배해졌다. 유럽 사회의 구조는 피라미드 체제였고, 철저한 상하 관계로 구성되어 있었다. 종교개혁은 교황과 성직자들을 정점으로 하는 권위체제를 거스르는 운동이었다. 개인의 자유와 특권에 대한 욕구가 강렬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사회의 기본 구조는 농지를 기본으로 하는 체제였고, 가족들끼리 연계되어 있었다. 군주들과 귀족들은 농부들을 무자비하게 억압하고 있었다. 기본적인 사회적 관계는 급작스런 변화가 없었다.

사회적 관계의 변화와 함께, 각자 자신들의 구원문제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의문들을 심각하게 제기했고 나름대로 모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가톨릭에서는 신학적으로 선명한 해답을 제공하지 않았다. 단지 고해성사를 지속적으로 반복해야만 한다거나, 미사의 참석을 통해서 각자 선행으로 공로를 세우라는 지침만을 제시했을 뿐이다. 사람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갈등하게 되었고, 과연 로마가톨릭이 제시한 것이 정당한가를 놓고서 대립적인 의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점차 미사의 참석 여부를 놓고서 각 개인들 사이에 전에 없던 긴장이 고조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교황들은 단일 조직체에서 수장이라는 권위를 지켜나가려고 했다. 단일 군주제도가 정치와 군사를 통괄하듯이, 교황권의 영향력 행사를 강화하려 했다. 16세기 초반 이탈리아 교황들, 식스투스 4세, 알렉산더 6세, 인노센트 8세 등은 각각 정치적으로는 화려하게 영향력을 과시했으나, 영적인 지도력에서는 실패했다. 누구도 이들 교황들을 신뢰하고 존경하지 않았다.

<계속>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교수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