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은 특정기사와 관련없음.

교주를 신비화하는 일에 앞장

한국교회의 기복적이며, 열광주의적 신앙, 성서와 다르게 변용된 신학적인 요소들은 극복되어야 한다. 특히 한국교회 교인들의 신앙형태는 무속신앙의 샤머니즘적인 요소들과 복합되어 있다는 것에 대해서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샤머니즘적이며, 기복적인 신앙은 매우 주관적이며, 신비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기독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가 이런 신비주의적 요소가 결여되어 있다면, 종교는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이다. 따라서 신비주의적인 것이 종교의 본질을 형성하고 있다고도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종교는 신비주의적인 것만으로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제도적인 것, 제의적인 것, 윤리적인 것, 나아가서 정치적인 것까지도 포함하는 것으로서, 매우 복잡한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다. 종교에서 모든 것을 신비주의적으로 판단하거나, 신비주의적인 것만을 강조하는 것은 많은 오류를 일으킨다. 오늘 한국교회 안에서 보수적인 교회의 교인들은 신비주의적인 신앙에 빠지기 쉽고, 진보적인 교회의 교인들은 매우 정치적이라는 말을 듣는다.

1992년 10월 28일 이장림의 ‘휴거설’이 전국을 휩쓸었을 당시, 신비주의적이며, 열광주의적인 교인들이 여기에 쉽게 빠져들었으며, 이들 중 상당수는 전 재산을 팔아 교주에게 바쳤다. 무엇보다도 이장림의 휴거에 열광주의와 신비주의에 빠져 있던 교회의 교인들이, 여기에 현혹되었다는 사실에 한국교회는 주목했다.

이장림의 휴거가 불발로 끝나면서, 전재산을 팔아 바친 일부 맹신도들이 재산을 돌려 줄 것을 요구하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졌다. 재산을 돌려받지 못한 맹신도들 중, 자살하는 사람이 생겨났으며, 신비적이고, 열광주의적인 신앙형태의 폐해가 그대로 드러났다.

한마디로 종교가 단지 신비주의적인 것만을 추구할 때, 그 종교는 쉽게 광신적인 것으로 흐를 위험성이 있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준 사건이라는데 이의가 없다. 사실 한국교회는 교회의 성장이 정체되면서, 일부 목회자와 부흥사들은, 신비주의적이면서, 열광주의적인 목회와 부흥회를 인도, 무엇인가에 쫓기며, 심령이 갈급함을 채워주었다. 그러나 여기에 익숙해진 교인들은 이것이 기독교 신앙과 믿음의 전부인 것처럼 착각했다.

한국교회가 이단으로 규정한 몇몇 종파와 기독교를 가장한 사이비집단들은 과도하게 창설자를 신비화 하거나, 기독교마저도 적대적인 경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신비주의와 열광주의에 과도하게 심취된 데서 비롯된 것이라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번 달에 일제히 열리는 장로교 총회에서도, 이단사이비를 둘러싼 논란은 피해 갈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해마다 한국교회는 이단사이비를 둘러싸고 논쟁을 벌여 왔으며, 대형교회의 일부 목사들은 한국교회가 적그리스도로 규정한 종파에 대해 면죄부를 주는데 앞장서는 모습도 보여, 이단 및 기독교를 가장한 사이비들에 대한 논란은 이번 보수적인 장로교단 가을총회의 중심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열광주의의 배타성 극복 중요

하지만 진보적인 교단들은 300여개로 갈라진 한국교회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다양성 속에서 한 분의 하나님, 한 분의 그리스도, 한 분의 성령을 고백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한분의 성부, 성자, 성령을 고백하면서, 분열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기독교 선교에 있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비주의적이며, 열광주의적인 신앙 형태는 분명 문제가 있다. 그것은 진보적인 교단들도 문제를 제기한다. 교주를 신비화하는 일과 더불어 치유나, 방언, 영서, 예언 등과 같은 것을 강조하는 열광주의적 신비주의는 건전하게 발전하지를 못하고, 교회의 질서를 무너트리고 있다는 애기다. 심지어 신비주의적 열광주의는 사회적 문제뿐만 아니라, 정치적 문제를 야기 시키기도 한다. 사실 이단사이비 종파가 정치적으로 개입, 대통령 선거나, 국회의원 선거에서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국회의원 중 상당수가 몇몇 종파로부터 후원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선거 때만 되면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렇다 열광주의적 신비주의는 대게 건전하게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것은 분명하다. 특정한 세속적 목적을 위해 신도들에게 과도한 헌금을 강요한다. 그 헌금은 대부분 조직관리와 교주 자신의 업적을 위해서 이용된다. 여기에서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며, 십자가의 탑을 높이면서 바벨탑을 쌓는 한국교회들도 자유롭지 않다.

그래서 일부 목회자들은 맘몬과 바벨에 길들여진 한국교회가 이단사이비에 대해서 논할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 사실 한국교회는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바벨탑을 쌓아 언제 십자가가 떨어져 사고를 일으킬지 모르는 상황에 있다. 성서는 분명하게 교훈하고 있다. 십자가는 교회당 꼭대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또한 한국교회 안에서의 종교개혁을 말하는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맘몬과 바벨에 길들여진 한국교회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 소돔과 고모라가 무너진 것과 같이, 무너져 내릴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리고 오늘 한국교회는 이단의 문제가 아니라, 사이비의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고 조언한다.

열광주의적 배타성은 극복되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신비주의적 열광주의가 다른 교단이나, 타 종교에 대해서 매우 배타적이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교회가 가장 문제시 하고 있는 S종파만 보더라도, 자신들에게만 구원이 있는 것처럼 말하며, 한국교회의 교인들을 빼앗는가 하면, 교회에 침투해 ‘교회의 질서’를 무너트리고 있다. 심지어 교회당을 통째로 빼앗고 있다.

그것에서 기성교회 교인들도 자유롭지 못하다. 배타적 열광주의에 빠진 그리스도인 가운데 타 종교와 이웃교단에 대해서 적대적이거나, 혐오감을 갖는 갖는다. 이들의 이러한 신앙은 결국 사회적인 문제, 정치적인 문제, 타종교와의 문제를 야기 시킨다. 이는 결국 기독교 선교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신비주의적 열광주의에 빠진 사람들은 동국대학교 안에 세워진 부처상 훼손을 비롯하여 절간에 세워진 부처의 이마에 빨간 십자가를 그린 사건, 십자가를 들고 절간을 돌며, 땅 밟기를 한 사건, 초등학교에 세워진 단군상의 목을 자른 사건, 홍익대학교 안에 세워진 장승 훼손 사건 등을 서슴지 않는다. 이런 사건들은 결국 종교 간의 화해를 가져오기는커녕, 종교 간의 갈등을 조장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것이 심하면 중동이나, 아프리카, 아일랜드, 인도 등에서 일어나고 있는 종교전쟁으로 발전한다는 사실이다.

종교 간의 대화통해 인류번영에 기여

어찌 보면 한국교회가 이단사이비로 규정한 종파들이 하나님나라운동에 가깝다고 말한다. 이들 종파는 이웃과 나눌 줄 알고, 이웃을 섬길 줄 알고, 사랑할 줄을 안다는 것이다.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는 한국교회가 다른 종파와 이웃종교를 무조건 정죄할 수 있는가. 한국교회는 종교지도자협의회를 통해 고등종교들과 건강한 사회와 한반도의 평화, 나아가 세계평화에 어떻게 봉사 할 것인지에 대해서 논의해 왔다. 이것은 종교 간의 대화와 화해라는 측면에서 매우 바람직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종파나, 다른 종교들의 생각을 무조건 배격하거나, 기물을 훼손하는 것은 올바른 종교인의 자세가 아니다. 한국에서도 가톨릭교회와 불교 사이의 대화가 활발하게 일고 있다. 이것은 종교사이의 협력을 위해서 매우 바람직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얼마 전까지 존속했던 종교인기자협회 역시 종교 간의 대화와 한반도의 평화, 인류의 번영을 위해서 논의하며, 종교신문들이 취해야 할 방향을 설정한 것은 매우 높이 평가할 일이다.

단군의 건국이념은 홍익인간을 교육이념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다양한 종교적 배경을 가진 어린이들이 공부하는 공립학교 안에 특정종교의 숭배이기도 한 단군 동상을 설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거기에다 예수상이나, 성모 마리아상, 부처상을 세운다면, 다른 사람들이 용납할 수 있겠는가.

개신교 교인이 한밤중에 몰래 숨어들어 단군상의 목을 전기톱으로 자르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이것은 당당하게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비겁한 행동이다. 공적인 논의와 여론형성을 통해서 공론화 과정을 거쳐서 그것들을 철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 이웃종교들과 협력해서 특정종교의 숭배자 동상을 세우는 것을 금해 줄 것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하나이다.

특정 이데올로기 극단적 반대도 극복

한국전쟁 이후 세계가 냉전체제를 거치면서 한국인들은, 특히 기독교인들은 소련과 동유럽, 북한의 공산주의 사상을 악마화하고, 그 체제하에 있는 국민들을 적개심을 갖는 이들이 유난히 많았다. 이것은 공산주의 사상이 적극리스도이기 때문에 적대적인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관념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히틀러가 유태인 600만명을 사살한 것도 유태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관념이 작용했다. 히틀러 혼자서 유태인 600만이 죽인 것이 아니다. 유럽인 전체가 여기에 동조했다. 남한의 국민들, 특히 기독교인들은 초등학교 교육부터 고등교육까지 이 같은 관념적인 교육을 받아 왔으며, 교회 역시 이러한 관념적인 신앙훈련을 시키는데 중심에 있었다. 오늘 한국교회가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분단의 현장에서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이지 못하는 이유도, 어려서부터 관념적인 교육을 받아 왔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겨 주셨다”(고린도후서 5장18절)고 했다.

그런데 성서를 철저하게 실천한다는 열광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은 반공주의와 이데올로기적인 관념에 사로잡혀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화해의 직분’을 망각했다. 동서 냉전체제는 소련의 붕괴로 막을 내렸지만, 한반도는 아직도 남북 간에 사상적 이데올로기적 관념에 사로잡혀, 적대적의 관계에 있다. 세계교회는 동서냉전체제의 중심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동서냉전체제를 종식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독일교회 역시 동서독이 하나 되는데 중심에 있었다.

이제 한국교회도 그리스도를 매개로 민족의 화해를 말해야 한다. 그리고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분단의 현장에서 하나님나라운동(통일)을 벌여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에 준 선물이며, 한국교회의 상황에서 기독교 선교의 본질이다. 칼 바르트는 “동서의 싸움은 진리와 비진리, 정의와 불의의 싸움이 아니라, 단지 헤게모니 투쟁, 즉 권력투쟁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오늘 한국 개신교 안에서 강한 힘이 등장하는 다양한 형태의 열광주의에 대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기독교의 사회적 신뢰성을 상실하게 하여 선교의 길을 막을 뿐만 아니라, 이웃종교들과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를 건설하는데 장애가 된다. 모든 극단적 광신주의와 열광주의는 인간성 자체를 파괴할 뿐만 아니라 교회의 존립 가체를 위협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운동에 막대한 영향을 행사하며, 하나의 한국교회운동에 방해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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