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 수 강 목사

기원전(100~44년) 로마 황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 사람은 눈앞에 보이는 현실만 보고 생각한다.” 라는 말을 했다. 인간 세상에 생존하는 모든 사람들 눈앞에는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육체의 정욕이 앞을 가려 웬만한 믿음과 신앙으로 단련된 인격적, 신앙적으로 됨됨이가 온전한 사람 이외에는 그 마음속을 가름하기가 어렵다. 요사이는 이성간의 불협화음이 잦은 세상이다. 남자들은 여성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이라고 하고, 여성들은 약간의 신체 접촉도 성추행이라는 도덕적 무기로 한 순간에 상대를 무너뜨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성추행 성 폭력이 세상일로만 치부하기엔 교회가 너무 순전한 모습이다. 교회에 신자들도 여성과 남성으로 구성 되었다. 그런데 성스러운 교회 안에도 심심찮게 세속적인 성 추행이나 성폭력 사건들이 일어나는 추세다. 거기에 성직자도 포함되어 있음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물론 사회에 드러난 사건 이외에 표면화 되지 않는 은밀한 사건들을 합하면 교회의 도덕성 자체가 흔들릴 수 있는 현실이다. 남녀가 모이는 어떤 곳도 성적인 추행이나 폭력은 비켜 갈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기독교 탈을 쓴 사교나 이단 세계는 더욱 공공연히 성추행과 성폭력이 일어나도 외부로 알려지지 않고 내부적으로 쉬쉬할 뿐 아니라 조직적으로 내부의 사건을 외부로 알려지지 않도록 피해자들의 약점을 잡아 위협을 주는 경우가 흔하다. 얼마 전 천주교의 성당에서 50대 신부가 20대 여성을 강제로 성 폭력 한 사건이 고소되어 경찰이 사건을 조사 중인 내용이 인터넷에 보도 되었다. 기독교에서도 몇 년 전 중대형 교회 젊은 목회자와 성도 간에 성추행 사건이 아직도 미해결로 남아 있기도 하지만 성스러운 교회라고 안전지대는 아닌 것 같다.

십자가를 구원의 상징으로 교회(성당) 건물 첨탑 꼭대기에 세워 세상 만민들에게 복음을 선포해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 받으라고 외치는 것이 교회의 역할이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정말 순전한 사람들이 영혼이 거듭나 하나님의 나라를 건강하게 전파하는지가 의문이다. 기독교도들도 교회에서 산제사인 예배를 드리기는 하지만 일상생활 속에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영적인 책무가 있다. 그런데 세상에 살면서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외면 할 수만은 없는 실정이기에 세상 사람들과 같이 탐욕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살아가야 하는데도 머리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는 있어도 행동은 그렇지 못한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현실이다.

이러한 표리부동한 신앙인의 생산은 교회교육의 근본부터 잘못 되었음을 교회 지도자들은 인식해야 한다. 예수님 승천 후 사도들에게 복음 전도의 사명을 위탁받은 교회는 세상에 부침을 견디다보니 초대 교회의 형태는 남아 있으나 교회의 진실성은 감소되었다. 교회의 이름은 건전한데 교회가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이 불분명한 것이 오늘의 실태다. 신앙인 한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데 올바른 신앙교육이 뒤 따르지 못한 결과가 부흥과 성장 이면에 가려진 교회의 실제 모습이다.

교회의 세속화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본뜻을 외곡 되게 하고, 특히 교회의 외형적인 성장 의존은 내외적인 불신만 키우는 결과만 낳고 있다. 교회의 외적 성장이 내적인 신앙과 믿음의 진실성과 동반 성장 한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지금 한국교회의 외적 성장은 내적 질이 퇴보되어 겉으로는 성장으로 찬란하게 보일지 몰라도 속은 이미 영적 병든 모습을 감출 수 없다. 교회가 무슨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할지 그 방향도 못 잡는 실정이다. 삶이 풍족해 선교 초기의 가난했던 시절 초근목피라는 단어조차 이해 못하는 세대들이다 보니 무엇을 위해 절실한 기도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모습이다. 그런데 아직도 지도자들은 성장과 축복 론이다.

지도자들도 무슨 대형 집회를 기획하면 거기에 한 자리 끼기 위해목사 보다 박사타이틀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성의를 벗어던지고 박사가운을 입어야 전문가로 인정받는 풍토는 학위가운 뒤에 숨어 있는 신앙의 본성이 어떤지 가름 할길 없다. 바울 사도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세상에서 얻은 모든 것을 분토와 같이 버렸다고 했는데 오늘의 지도자들은 벗어 던진 세상의 것들을 다시 입으려고 애를 쓰는 모습 애처롭다. 필생 역작으로 번듯하게 지은 고급 교회 건물로 인해 세계각처에 굶주림에 죽어가는 생명들의 눈물과 원성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는지? 값싼 복음으로 예수님의 능력을 팔아먹는 삯군들의 개기름 낀 얼굴 뒤에 병고에 시달리는 독거노인들과 불쌍한 과부와 고아들을 생각해 보았는지? 눈앞의 현실도 알 수 없거늘 하물며 감춘 본성을 누가 알랴?

필운그리스도의교회/ 본지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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