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날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드리우시고,
들판에는 바람을 풀어 놓아 주소서.

마지막 열매들을 영글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따뜻한 날을 베푸시어,
열매들이 온전히 무르익게 하시고
진한 포도주에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해 주소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홀로 있는 사람은 오래도록 그럴 것이며,
깨어서,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고
낙엽이 떨어져 뒹굴면, 불안스레
가로수 길을 이리저리 헤맬 것입니다.

▲ 문 현 미 시인
고독과 사랑 그리고 장미 가시에 찔려 떠난 시인 릴케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외국 시인들 중의 한 사람이다. 괴테 이후 독일어권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 받는 그는 자신의 『예술론』에서 “네 안으로 들어가 봐라. 그리고 너의 힘든 것으로 세워라. 네가 스스로 밀물과 썰물로 변화하는 땅이라고 한다면, 너의 힘든 것은 네 안에 있는 집과 같은 거다.”라고 했다. 자기 자신이 하나의 세계여야 하며 자신의 힘든 것이 자기 중심 안에 있어서 스스로 끌어당겨야 한다는 예술론은 인간 실존의 고통에 대해 깊이 묵상하게 한다. 고통을 통해 인간은 실족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 속에서 자신의 내면 세계로 더 침잠해 들어갈 수 있다. 릴케는『젊은 시인에게 바치는 편지』에서 자신의 마음 깊은 곳으로 들어가서 글을 쓰고 싶은 근거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고 쓰지 않으면 죽음을 택하겠느냐는 질문을 던져보라고 한다. 얼마나 준엄한 글쓰기 또는 시쓰기인가.

시「가을날」은 잘 알려진 시로서 번역도 다양하다. 필자는 오랜 기간 독일에서 한독비교문학을 연구했기 때문에 이 시를 직접 번역해 보았다. 시의 묘미는 첫 연, 첫 행에서부터 시작된다.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라는 선언적 표현이 주목을 이끈다. 주께서 주관하시는 자연의 섭리를 독자의 뇌리에 각인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뜨거웠던 지난 여름날에 대한 감사와 감탄이 이어진다. 인간의 결과물이 아닌 주께서 이끄셨던 여름이었기에 ‘위대하다’는 시어를 선택했다. 시인은 다가오는 가을날 앞에서 간절히 기도한다. 그 어떤 가을 열매도 주의 손길이 닿지 않으면 익어갈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시의 구조는 주께 간구하는 인간(전반부)과 고독한 가운데 불안에 떠는 인간(후반부)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가을의 풍요로움와 가을에 불안과 고독 속에서 쓸쓸해지는 비어 있음이 대비됨으로써 탄탄한 시적 긴장을 유발한다. 릴케는 실존의 불안과 실존적 고통이 시를 쓰게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고통이 예술의 완성을 향해 가는 길이라는 역설이 성립된다. 지금 우리 인생의 계절은 어느 때에 와 있는지... 이제 가을의 문턱이다. 저녁 바람에 간간히 들리는 풀벌레 소리가 울음인지 노래인지는 우리들 가슴에 달려있지 않을까. 들녘에서 열매 익어가는 소리 들리는 듯하다.

백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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