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재 성 교수ㅜ

이들 교황들의 관심사항은 정치와 전쟁, 예술과 문학, 사냥과 호화스러운 생활과 건축 등이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사도적 의무감은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제 5차 라테란 종교회의(1512-1517)은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이전에 마지막 기회로 주어진 종합적인 반성과 갱신의 기회였다.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이 회의를 통해서 교회와 성직자들의 윤리를 갱신하기는 고사하고, 오직 교황에 대해서 철저한 압박을 강요하였다. 프랑스 국왕 루이 12세는 교황이 왕에 대해서 저주하는 행동을 했다고 비판하면서, 교회의 갱신을 요구했다. 불만족스러운 추기경들을 규합하여 1511년 9월 1일 회의를 소집했다. 그러나 다음 교황 레오 10세가 물려받은 회의에서는 결국 교황권이 지상의 모든 권세들보다 위에 있음을 주장하던 교서(Unam sanctam, 1302)를 재확인했다. 그러나 레오 10세는 자신이 경쟁자 우르비노 추기경과의 싸움에 빠져 있었다.

도시인들의 상호 관련성은 시의회와 군주들이 장악한 재물과 상업에 의존하였다. 이들은 상호 결혼관계로 연계성을 유지하면서 정치적 영향력과 독점체제를 지탱했다. 도시인들 사이의 긴장관계는 종교개혁으로 진행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4. 무너지는 성직자 중심주의

곳곳에는 성직자들이 넘쳐났는데 이들의 윤리적 타락으로 인해서 로마가톨릭에 대한 신뢰가 무너져 내렸다. 성직자중심주의가 오래 지속되면서 함량미달의 성직자들이 양산되었기에 만들어진 부패가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교회 내부에서 자체적인 갱신을 한다는 것은 무의미해졌고, 더 이상은 방치 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고 말았다. 교황 알렉산더 6세에 이르게 되면서 성직자들의 무관심, 부도덕, 불법행위가 극에 달하였다. 많은 교구에서 서로 격돌하는 성직자들이 많았다.

16세기 초, 성직자들의 숫자는 전체 인구의 10분의 1에 해당할 정도로 늘어났다. 제일 큰 도시 독일 콜론에서는 인구 4만 명에 6천 여 명이 성직자들이었다. 상류귀족들을 상대하는 높은 성직자들은 귀족집안 출신들이었고, 하층 서민을 상대하는 교구 신부들은 하류 계층에서 나온 사람들이어서 충분한 교육과 훈련을 받지 못하였다. 영국 성직자들 가운데 10%내지 20%만이 대학교육을 받은 분들이었다. 독일에서는 교육받은 성직자들이 절반 가량 되었다. 일반 성도들도 거의 대부분 문맹자들이었기에 성직자들에게 높은 교육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중세 성직자들은 독신주의 서약을 하고서 성례를 집행하는 자리에 올랐지만, 3분의 1가량은 내연의 처를 갖고 있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성직자들이 아내를 얻는 것을 공공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종교개혁 이전에 교황 피우스 2세는 당시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 성직자의 결혼을 긍정적으로 검토하였다. 그렇지만 로마 교회는 그 방향으로 개선안을 채택하고 바꾸려 하지 않았다. 많은 주교들이 성직자들의 아내들과 불법적으로 출산한 자녀들을 위해서 종교세금을 더 거둬들이려고 하였다.

도시의 부인들과 여인들은 수도사들에게 위협과 조롱을 가하기 일쑤였다. 여성이 수녀회에 들어가는 이유는 사랑하는 남자를 얻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티롤에서는 상류층 귀족 여인이 수도회를 창녀촌으로 만들었다가, 강제로 폐쇄되는 일이 발생했다.

로마 교회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서 벌이는 교회의 조치들 속에는 물욕, 탐욕, 욕심들이 가득히 담겨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지방 교구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다 파악하고 있었다

<계속>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교수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