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 헌 철 목사

몇 십만의 인간이 한 곳에 모여 자그마한 땅을 불모지로 만들려고 갖은 애를 썼어도 , 그 땅에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게 온통 돌을 깔아버렸어도, 그곳에 싹트는 풀을 모두 뽑아 없앴어도, 검은 석탄과 석유로 그슬려놓았어도, 나무를 베어 쓰러뜨리고 동물과 새들을 모두 쫓아냈어도, 봄은 역시 이곳 도시에도 찾아들었다. 따스한 태양의 입김은 뿌리째 뽑힌 곳이 아니라면 어디에서고 만물을 소생시켜, 가로수 길의 잔디밭은 물론 도로의 포석 틈새에서도 푸른 봄빛의 싹이 돋고, 자작나무와 포플러와 구름 나무도 봄 내음 풍기는 촉촉하고 윤기 나는 잎을 내밀고, 피나무도 이재 막 싹을 틔우고 있었다.

둥우리를 만들기에 바쁜 떼까마귀와 참새와 비둘기는 새봄을 맞아 아주 즐거워 보였고, 양지바른 담장 가에서 파리들도 분주하게 날고 있었다. 식물도 새도 곤충도 어린애들도 모두 명랑했다. 그러나 사람들(어른이 된 사람들)은 여전히 자기 자신뿐 아니라 서로서로를 속이고 괴롭혔다. 사람들은 이 봄날 아침에 신성하다거나 의미 깊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 온갖 만물의 행복을 위해서 신이 마련해 주신 세계의 아름다움, 즉 평화와 화평과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을 끌어들이는 아름다움이 아닌, 상대방을 지배하기 위해 그들 스스로를 생각해 낸 일들만이 가장 신성하고 의미 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출처 : 톨스토이 저. 박형규 옮김. 부활)

언제부터인가 인문학의 열풍이 불고 있다. 따라서 많은 이들이 강좌 등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며 듣기도하며 읽기도하며 보기도 한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유는 인문학 자들, 철학자들이 ‘도스토예프시키나’, ‘톨스토이’의 소설 등이 담고 있는 함의(含意)와 그 소설들이 지금의 우리에게 주고 있는 교훈, 그 소설들의 탁월성 등을 말 할 때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배제 된다는 감을 지울 수 없어 아쉬움을 갖게 한다.

‘톨스토이’는 물론이고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는 말할 것도 없이, ‘죄와 벌’에서 희망을 강 건너에의 자유(사랑, 참된 기쁨, 행복, 환희 등)에로의 향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 또한 죄의 고백, 물질의 노예, 인간의 참된 행복은 성경에서 그 지혜를 얻어 담아내지 않고는 표현 될 수 없는 내용들이다.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역시 돈, 치정, 살인, 삶과 죽음, 사랑과 증오, 선과 악 등, 인간의 본성의 탐구를 통해 지옥과 지옥 불, ’조시마‘ 라는 수도사의 “양파 한 뿌리”에서 보여주는, 천국, 지옥행에 대한 삶을 담아내지 않는가?

물론 동방정교회의 신앙인이란 점을 떠나, ‘도스토예프스키’가 ‘또볼스크’감옥(정치범 수용소)에 들어갈 때 받은 ‘신약성경’을 인생을 마감하는 때까지 간직하였으며, 마지막 순간에도 젊은 아내 ‘안나 그레고리 예브나 스니뜨기나’에게 그 ‘신약성경’을 읽어줄 것을 요청한 대목에 이르는 데서도, 그는 철저하게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였음을 볼 수 있다. 물론 그의 인생에 도박과 간질, 어둠과 빛, 고통과 평안, 불행과 행복 등이 교차되는 삶에서 우러나는 것들을 소설에 담아냈겠지만, 그의 삶 역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희망(소망)을 잃지 않았음을 보게 되며, 그의 젊은 아내 역시 그의 마지막 순간에도 그 성경을 읽혀 주었다는데서 그 젊은 아내의 섬김과 사랑 역시 하나님의 말씀 곧 그리스도의 사랑의 실천이 아니겠는가? 함에도 불구하고 인문학자, 철학자들은 왜 그다지도 성경(하나님의 말씀)과 신앙의 지혜에 대하여는 외면해야 하는지를 이해 할 수가 없다. 따라서 ‘톨스토이’나 도스트예프스키‘ 소설을 이야기 할 때에는 반드시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을 배제하지 말고 그들의 소설의 배경에 성경(하나님의 말씀)과 신앙이 있었다는 것도 함께해 주길 바란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롬11:33).

한국장로교신학 학장•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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