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 헌 철 목사

교황 알렉산드르 6세는 여러 명의 여인들 사이에 여섯 아들과 세 딸들을 두었다. 교황의 자녀들 중 페드로 루이스(1462년경~1488년)와 이사벨라(1467년경~1541), 지롤라마(1469년경~1483), 조반니(1498년~1548), 그리고 로드리고(1503년 생)의 어머니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렇지만 그들 모두는 최고 권력을 가진 아버지 덕분에 높은 직책에 앉거나 유력한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었다. 알렉산데르 6세의 가장 유명한 두 자녀는 체사레와 루크레치아로, 둘 다 바노차 데이 카타네이의 소생이었다. 그녀와 알렉산데르 6세의 관계는 1475년에 시작해 그 후 10년간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1475년에 아들 체사레가 태어났고 1480년에 딸 루크레치아가 태어났다. 이 외에도 두 자녀가 더 태어났는데, 둘 다 아들이었다. 한 명은 훗날 간디아(스페인의 한 지방)의 공작 및 교황 군대의 총사령관이 된 후안이고, 다른 한 명은 훗날 스퀼라체의 공작이 된 호프레였다.

한편 알렉산데르 6세에게 1500년은 의미심장한 해였다. 그는 그해를 희년으로 선포했다. 그의 예상대로 수많은 순레자들이 신성한 도시 로마로 몰려왔고, 희년에만 판매하는 특별 대사를 사고 엄청난 돈을 기부해 교황정 금ㄱ를 넘치도록 채워주었다. 또 희년을 기념하기 위해 그는 성 베드로성당에 ‘성문(聖門)’을 설치하게 했다. 이 문은 희년 첫 날에 열고 마지막 날에 닫도록 되어 있는데, 이 관습은 지금까지도 지켜지고 있다. 1500년의 희년 선포는 한편으로는 기대하던 목적을 달성했다. 즉 알렉산데르 6세의 아들 중 한명인 체사레가 필요했던 충분한 군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희년 선포는 원치 않은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수많은 신도들이 교황의 어마어마한 부와, 거룩한 도시를 좀먹어가는 부패를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순례자들은 큰 환멸과 불만을 가슴에 품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503년 8월 11일, 베드로 대성당에서 매년 거행되는 교황당선 기념 미사에 알렉산데르 6세는 참석하지 못했다. 열병으로 앓아누웠기 때문이다. 주치의들의 처방에도 불구하고(실은 바로 그들의 처방 때문이라고 말해야 더 진실에 가까울 터인데)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그는 숨을 거두었다. 그날은 날씨가 매우 후덥지근해 시신이 금방 부패했다. 시신을 시스티나 성당에 안치해둔 동안 얼굴이 진한 자주색으로 변하고 군데군데 검푸른 점이 나타났고, 입술은 부풀어 올라 흉하게 일그러졌다. 시신은 심하게 부풀어 올라 관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그래서 관리들은 시신을 낡은 카펫으로 둘둘말아 관 위에 걸친 다음 손으로 쑤셔 넣어야만 했다. 참으로 혐오스러운 장면이긴 하지만 파격적이고 거만했던 교황에게는 상징적인 종말이라 하겠다.(출처 : P.G. 맥스웰-슈트어트 지음. 박기영 옮김. 교황의 역사. 갑인공방. 2005)

탐욕, 오만, 거만 등은 물론 수많은 정부(情婦)들을 거느리고 사생아(私生兒)를 양산한 알렉산데르 6세는 르네상스 시기의 교황 중에서 가장 타락한 교황으로 손꼽힌다. 따라서 그의 종말과 아리안 다 포르네토(Arian da Porneto) 추기경이 “독이든 과자”로 알렉산데르 6세를 독살 했다는 이야기[마리노 시노투(Marino Sanuto) 일기] 등 가톨릭의 역사를 보면서 우리는 무엇이라 하는가? 그러나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한다는 우리에게는 알렉산데르 6세, 그를 독살한 추기경 등과 같은 죄악(罪惡)은 없을까? 권력과 돈의 노예, 정치세력화, 왜곡, 의도적 편향성, 불의 부패 등을 비호하는 행위로 거센 비방이 날로 심화 되어 간다고 생각지 않는가? 그러나 그들의 비방보다도 더 두려운 것은 결과적으로는 “우리가 예수님을 비방하고 있다!”는 것이다.

"너희에게 화가 있었다. 위선자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게 하지만, 그 속은 착취와 방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마 23:25).

한국장로교신학 학장•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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