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 도다”(롬 7:19). 바울은 지금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나’라고 믿고 있는 ‘나’는 과연 내가 그렇게 믿고 있는 것처럼 분명한 ‘나’인지 자문하고 있다. 내 속에 또 다른 ‘나’가 있어 ‘나’를 주관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며, 끌고 가기 때문이다. 내 속에 “원하는” 나와 “행하는” 나가 분열되어 있음이다. 바울은 여기서 율법종교의 한계 즉, 인간의 한계를 보게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고, 내게 오신 그분에게 나를 위탁할 때만이 나는 구원받을 수 있다. 내가 분열된 나 안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을 때 참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우리는 가룟 유다에게서 자기 안에 있는 자의 비참한 말로를 본다. 유다는 예수께서 누구 못지않게 사랑한 제자이다. 그런 제자가 스승 예수를 배반했다는 것은 심히 통탄할 일이다. 하지만 바울의 관점에서 보면, 분열된 자기를 절대화한 사람들이 저지르는 필연적인 결과이다. 유다가 처음부터 나쁜 동기로 예수에게 접근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는 누구 못지않게 스승 예수를 사랑했던 사람이다. 동료 사이에도 신망이 두터웠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스승의 발꿈치를 들고 말았다. 바울에 의하면, 자기도 구원하지 못하는 자가 세상을 구하겠다고 나선의 결과이다. 베드로의 배신도 알고 보면 가룟 유다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나’ 자신과의 약속이 아닌 하나님과의 약속이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자신과의 약속, 결심, 의지를 중요하게 여긴다. 하지만 ‘나’라는 인간은 믿을 만한 존재가 못된다. 내가 나를 속이는 존재이다. 자기 최면을 걸어서라도 나는 옳다고 강박하는 존재이다. 뉴욕대학 심리학 교수인 폴 비츠의 [신이 된 심리학]에 의하면, 자아숭배를 부추기는 현대 심리학도 여기에 가담한다. 나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나머지 나를 숭배하는 단계에 이르면 결국 병적인 자아를 형성하게 된다. 우리는 분열된 내 존재를 치유하시는 하나님께 ‘나’를 의탁해야 한다. 내가 온전히 주님 안에 있을 때 비로소 절망은 희망이 된다.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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