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 성 택 목사

흘러간 물로는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다고 했다. 거역할 수 없는 자연의 이치이다. 질량불변의 법칙이 존재하더라도 쓸 수 없는 에너지는 이미 의미 없다. 이처럼 삶의 현장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이 많고 그로 인해 아쉽지만 모두를 위해 접어야 하는 이야기들이 많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자연의 이치가 그러한들, 인간사가 그렇게만 흘러갈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을 순진한 이상주의라고 조롱하는 이들이 있다. 흘러간 물을 돌려 다시 물레방아를 돌리고, 사라져버린 에너지를 다시 살려내는 기술자들이 바로 그들인데, 오늘의 정치인들이다. 그들은 이것을 정치의 맛이요 살아있는 생물로서의 정치적 매력이라고 한다.
 
그런 정치인들에 의해 우리시대는 답답한 정치적 딜레마에 빠져있다. 집권세력은 촛불의 힘으로 집권하면서 적폐청산을 공약했다. 그러나 적폐청산은 분명히 과거의 문제를 다루나 그 방점은 미래에 있어야 하고, 그 성공을 위해서는 목적과 수단이 정당해야 한다. 과거 일제청산은 이 두 가지에서 모두 실패했다. 그들은 미래를 위한 청산이 아니라 보복이었고 한풀이였으며 그것도 중간에 중단되고 말았다. 다 아는 이야기를 되씹을 필요가 없어 생략하지만 일제청산은 목적과 방법에서 모두 실패한 대표적인 적폐청산의 사례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적폐청산이 그 전철을 밟으려 한다. 지금 이를 추진하는 이들의 일련의 조치들을 보면서 국민들은 시기와 의도에 대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으며, 청산대상이 된 이들은 ‘부관참시’라는 오해를 받으면서도 기꺼이 노무현 전 대통령을 무덤에서 끌어냈다. 결국 ‘적폐청산 VS 부관참시’의 정치적 투쟁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흘러간 물이라도 기꺼이 되돌려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릴 수 있다고 믿고 있는 듯하다. 부관참시라도 해서 맞서보겠다는 이들과 노무현의 노자만 나와도 벌떼같이 일어서는 세력과의 한판 대전(大戰)이 공개적으로 시작되고, 이것을 즐기는 사람들이 양측에서 모두 웃고 있다.

강조하거니와 적폐청산의 방점은 미래에 있어야 한다. 미래를 위한 과거청산이 아니면 그것은 한풀이요 분풀이라는 비난을 면치 어렵다. 그러므로 적폐청산의 주도 세력들은 비록 자신들의 한이 크고 분함과 아픔이 깊을지라도 그런 오해의 가능성이 있다면 방법을 달리해야 하고, 승자라는 표현이 지나치다면 집권자의 책무로서 미래를 보고 적폐청산의 틀을 짜야 한다. 사통팔달 정보홍수와 높은 교육수준 그리고 훈련된 민주의식으로 무장한 오늘날의 국민들은 어느 측의 일방적인 주장에 무게를 실어 주지 않는다. 누가 정직한지 누가 바르게 하는지를 말을 않을 뿐 알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제 맞서는 소위 청산대상자들도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다 하겠다는 망국적 발상은 더 큰 화를 자초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좌든 우든 그 생존법칙은 윤리성이다. 그 윤리성은 양심에 근거해 있는 것이라서 아무리 노선이 달라도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한 잘잘못은 스스로 알고 있을 터, 자신이 부당하게 적폐청산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면 수단과 방법에서 정당하게 시민의 의식에 호소하고 법적 판단으로 맞서야 한다. 아무리 억울한 생각이 들더라도 과거를 되돌려 어떻게든 막아보겠다는 생각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이 말이 적폐청산 주도 세력이나 대상에게 해당되는 말인 줄 알 것이다. 주도세력들이 미래적 방점과 시각을 잃고 한 풀이에 집착한다면, 그 대상세력은 부관참시라도 해서 국민적 처분을 막아보겠다고 한다면 이 나라 정치는 후퇴할 것이요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이 입을 것이고 민심은 이를 기억하고 다시는 그에게 나라국정의 책임의 작은 일부라도 결코 맡기지 않을 것임을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리스도대학 전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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