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탁 기 목사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이며, 달이다. 천사들은 예수님의 탄생의 의미가 하늘에는 영광, 땅에서는 고난당하며, 갈등가운데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평화라고 노래했다. 바울도 그리스도 찬가에서 “그리스도는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으로 사람과 같이 되었고, 자기를 낮추어 죽기까지 복종했다”(빌립보서 2장 7-8절)고 선언했다.

예수님의 시간과 장소는 고난당하는 사람들의 시간과 장소였다는 것을 말해 준다. 교회의 시간과 장소는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신 고난당하는 사람들의 시간과 장소이어야 한다. 신학도 고난당하는 사람들의 시간과 장소에서 출발하고, 그 곳에서 귀결되어야 한다. 헌데 오늘의 교회는 교회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를 않다. 또한 신학도 고난당하는 사람들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학이라고 볼 수 없다.

신학함과 교회에 대한 의미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오늘 한국교회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매몰돼, 하나님이 아닌 맘몬이 지배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예수님께서 고난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역사의 현장에서 벌인 하나님나라운동은, 교회들이 부자가 되면서 수명을 다해가고 있다. 한국교회가 텅 빈 유럽교회와 미국교회를 비판하기 이전에, 오늘 한국교회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이고 있는가를 되짚어 보아야 한다. 그것은 신학도 마찬가지이다.

오늘 기독교회의 모습은 한마디로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는데 급급하다. 신의 자리를 맘몬(돈)이 대치했다. 목회자는 강단에 오르자마자 헌금 이야기부터 한다. 헌금의 액수에 따라 하나님나라가 결정된다. 신앙의 척도도 결정된다. 성서의 정신과 다르게 부자들의 눈물을 닦아주며, 가난과 전쟁, 그리고 떠돌이, 불구자들을 외면하는 교회가 바로 이단이며, 적그리스도이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자본주의 시장경제 원리에 길들여져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에 길들여진 오늘의 교회는 정의와 불의의 싸움이 아니다. 헤게모니를 쥐기 위한 권력의 싸움이다. 이는 이번 일부 교단의 가을 총회에서 그대로 나타났다. 그러면서 종교개혁 당시 공의회를 인정하지 않은 중세교회의 교황을 비판한다.

그렇다. 오늘의 한국교회에는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없다. 호화로운 십자가만 호화로운 건물 꼭대기서 밤하늘을 수놓고 있다. 언제 십자가가 땅에 떨어져 사고를 일으킬지 모른다. 십자가는 불의한 정권을 옹호하는데도 여지없이 등장했다. 그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행동으로 보여 준 것처럼, 등에 지어야 한다. 그래서 일부 신학자들은 오늘날의 신학, 헬레니즘을 시도했던 초대교회의 신학, 중세 봉건사회체제의 정치적, 종교적 지배계급을 위한 로마 가톨릭신학, 종교개혁 후 등장한 서구의 부르조아적 자본주의 경제적, 사회적 토대를 위한 자유주의적 신학과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 신학은 결국 실패했다. 이러한 신학을 토대로 형성된 교회공동체는 수명을 다해가고 있다. 이미 많은 유럽교회는 문을 닫았으며, 남은 교회들은 노인시설 등으로 전환되고 있다. 오래된 교회들은 관광객들이 기념사진이나 찍는 장소로 변질됐다. 종교세를 내는 국가의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에 대해서 염증을 느끼고 탈퇴한다. 많은 교회들이 정부의 지원이 끊겨 재정적자에서 헤어나지를 못한다.

교회와 신학은 진정한 의미에서 가난하고 억눌린 고난의 현장에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현현과 예수님께서 성육신 하신 때와 장소가 그 출발점이며, 종착점이다. 그런데 한국교회를 비롯한 세계교회는 맘몬과 바벨에 길들여진 나머지, 맘몬이 교회의 전부이며, 맘몬은 높은 바벨탑을 쌓는데 사용되고 있다.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쓰여 지는 돈은 아주 미미하다. 그러면서 기독교가 좋은 일을 가장 많이 하는데 언론으로부터 몰매를 가장 많이 받는다고 푸념한다.

그리스도의교회협 증경회장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