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바 울 목사

종교개혁 500주년이다. 돈을 좋아하는 한국교회는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길들여진 한국교회는 신의 자리를 맘몬으로 대치했다. 그의 현현은 다우존스 주가지수이고, 그의 성체는 달러이며, 그의 마사는 환율조정이고, 그의 나라는 자본주의 보편문명이 되었다. 그래서 한국교회 종교개혁 제1성으로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실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적 경제체제에 길들여진 우리사회의 면면을 살펴보면, 푼돈을 받은 정치인과 공무원은 철장신세를 지지만, 수백억원의 부정한 정치자금을 준 기업인들은 면죄부를 받는다. 검찰의 소환조사에서 잘도 빠져 나간다.

부자 목사들 역시 잘못을 저질렀어도 총회에서 눈감아 준다. 또 부정한 돈으로 총회장도 산다. 감독도 산다. 이것 때문에 한국교회가 얼마나 몸살을 앓았는가. 소모적인 싸움을 벌이고 있는가. 한국교회가 청산해야 할 적패가 아닌가.

교회를 지배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그의 정신이 아니다. 예수님이 그렇게도 배척하던 돈이 교회를 지배한다. 어느 교회는 장로가 되기 위해서 1억원을 받쳐야 한다. 신앙심이 좋다고 장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교회는 하나님과 맘몬을 함께 섬기려고 했다. 그래서 루터는 500년전, 타락한 중세교회, 돈을 좋아하는 교황에 저항하며, 종교개혁을 단행했다.

작금 한국교회가 스스로 가치관을 상실하고 있는 것은 영미와 유럽의 상업자본주의 체제를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물이다. 유럽의 교회들이 세계화 또는 선교라는 이름 아래 가난하고, 천박한 세계민족에게 얼마나 고통을 주었는가. 스스로 기독교인이기를 포기하게 했다.

오늘 한국교회는 미개한 조선의 백성들에게 유럽의 선진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 받았기 때문에, 우수한 선진문화를 보급해 주었기 때문에 ‘축복’이라고 거침없이 말한다. 이런 사이에서 제3세계의 가난하고 미개하고 백성들은 ‘선교’라는 이름아래 죽임을 당했다. 또한 이들은 삶의 자리를 그들에게 내 주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빼앗기고, ‘혼’까지 그들에게 내주었다. 이런 그들의 행위는 모두 ‘선교’라는 이름 아래 자행되었다는데 문제가 있다.

보수적인 한국교회는 영미와 유럽의 영향을 받아 대한민국이 ‘축복’과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기독교의 선교가 시작되면서, 수명을 다한 이씨조선의 천박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깨어나기 시작했고, 남녀평등이라는 새로운 세상을 열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일각에서는 선교초기 영미선교사들의 선교형태가 어떠했는가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하고, 바른 역사를 정립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초기 조선에서의 선교는 선교사들에 의해서 주창된 정교분리원칙에 따라 민족의식과 역사를 몰각하는 잘못을 범했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민족공동체와 유리되었으며, 1927년 일본국가주의에 굴복, 하나님을 배신하는 배교의 잘못을 범했다. 그럼에도 기독교 선교는 가난하고 천박한 백성을 향한 교육사업과 봉사, 그리고 평등과 도덕성 회복에 크게 공헌했다. 그러나 교회가 부자가 되면서, 권력의 주변을 맴돌면서, 많은 혜택을 누렸다. 그리고 예수님의 ‘삶의 현장’과 유리되어 기독교 스스로 소외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교회가 있어야 할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에 교회는 없었다.

유럽의 시장경제 체제와 콜럼버스에 의해서 시작된 기독교의 세계화는 하나님의 자리에 맘몬으로 대치시키는 오류를 범했다. 새로운 세상,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처럼 맘몬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있어야 할 자리에 하나님을 모셔야 한다.

예장 호헌 증경총회장•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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