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 인 찬 목사

'햇빛만 쏟아지는 곳은 사막이 된다.' 는 아랍 속담이 있다.

햇빛만 있는 곳은 사막이 된다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도 진리다. 검은 구름이 하늘을 덮고, 비가 쏟아질 때 거기에 생명의 환희가 일어난다. 눈물 없는 인생은 사막화 된다. 눈물이 없으면 그 웃음마저도 허탈 이상이 아님을 깊이 깨닫는 사람은 인생을 아는 사람이다.

신앙생활에서도 이 눈물, 애통이 차지하는 비중은 가히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눈물을 통과하지 아니한 신앙은 값싼 상여 꽃 같은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 믿고, 즐거워 웃기만을 기대하는가? 아직은 어리거나 값싼 신앙이다. 예수 믿고 하나님 앞에 진지하게 울고, 십자가를 사모함으로 아파한다면 나름 차원 있는 신앙이거나 경험한 신앙인이다.

애통이 우리 신앙을 본질로 향하게 하고, 눈물이 우리 신앙을 본질로 인도한다. 눈물이 고인 눈에 십자가의 주님이 보이고, 애통으로 젖은 가슴에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이 나타난다.

애통하는 심령은 나를 찾아오시는 예수그리스도의 발걸음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우리의 신앙은 눈물을 먹고 자란다. 우리의 인격은 눈물의 골짜기를 통과하면서 성숙한다. 신앙을 아는 사람은 눈물을 부정(否定)의 눈으로 보지 않는다. 애통을 싫고, 두려운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성경은 신앙을 ‘탄식’이라는 말로 요약하여 정리하고는 한다. 대표적으로 로마서 8:23절을 들 수 있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날마다 탄식하며 이 썩을 몸을 빨리 벗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입으신 그 영광스럽고 거룩한 몸으로 입게 될 그 날, 양자될 그 날, 우리 몸이 구속 받을 그 날을 사모하며 탄식한다는 말씀이 아닌가.

같은 의미가 고린도후서 5:2절 말씀에도 있다.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애통하는 눈물의 깊은 은혜, 감사를 품고 사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이요 삶이어야 한다. 신앙의 심연에 눈물의 강이 지하수처럼 흐른다. 이 사실을 모르거나 부정하는 신앙은 저급하다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하신 말씀에 대한 재인식을 요구 받는다.

누가 애통하는 자인가? 자기 죄와 허물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자가 애통하는 자다. 우리 모두는 예수 믿고, 속죄의 은총을 받았다. 그러나 분명히 할 것은 어디까지나 선언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 없다고 선언하시는 것이지, 실제로 우리 죄가 없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는 그리스도요,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는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죄 없다고 선언하시는 것이지, 실제로 내게서 죄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물론 성화의 과정에 있는 우리이지만 무균 실의 사람이 모든 균들로부터 차단된 것처럼 죄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죄의 작업장이랄 수 있는 이 부패한 몸을 입고, 죄의 화원에서 하루 수백 번도 더 죄를 짓거나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 우리 모두는 죄의 유혹이 쉴 새 없이 파고드는 장망성인 이 세상에 살고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신은 성령 충만함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때문에 죄도 없고, 회개할 것도 없다하고, 죄 때문에 애통하며 눈물 흘리는 사람에게 사죄의 확신이 없으니까 그렇게 질질 짜며 우는 것이라고, 주님이 죄를 다 용서하셨으니 웃으라고 말한다면 그는 사도 요한이 전한 말씀대로 거짓말하는 사람이다.

사도 요한의 말씀은 분명하고 또렷하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1:8) 이런 이유로 우리 모두에게 울고, 애통해야 될 이유가 충분하다. 하루에 백 번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애통해야 될 이유를 우리는 가졌다.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 애통하는 사람 아니다. 구원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애통한다.

죄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나의 뻔뻔스러움과 교만으로 답답하다. 형식적이고, 스스로 위로하는 짧은 기도로 내 죄가 다 용서받았다고 너무도 당당해하는 나를 인함이다.

진정 애통하며 회개하는 가슴의 신앙인이 희귀한 시대다. 하나님이 내 입술의 기도를 들으시고, 진정 나를 용납하시고 받아주시기를 사모한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깊이 반성하고, 돌이켜 회개하므로 십자가 밑의 애통하는 깊은 묵상의 무릎을 꿇는다.

의왕중앙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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