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 헌 철 목사

‘디트리히 본회퍼’는 1939년 미국 유니온 신학교 재직 시,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에 주님 앞에 꿇어 엎드렸다. 그는 전쟁으로 활활 타고 있는 조국 독일을 보았다. 그리고 지금 무서운 투쟁에 휘말려 들어가고 있는 독일과 믿는 형제들을 생각했다. - ‘본회퍼’는 나치독일의 형편을 보고만 있기에는 너무나 힘들었다. 그는 죽을 각오로 국민의 앞장에 서기로 결심하고 먼저 저항운동을 위한 지하조직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사랑하는 동지들을 규합하여 독재자 히틀러의 암살을 계획하였다. 1943년 3월 13일 히틀러 암살음모가 실패로 돌아가자 국방부 정보부의 무능을 탓하고 숙청하기 시작, 1943년 4월 5일 본훼퍼는 체포되고 말았다. 그는 패틀린 감옥에서 8개월간 갇혀 있으면서도 다시 히틀러의 암살을 계획하였다.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이 두 번째로 실패하자 본회퍼에게는 죽음이 바싹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심한 폭격 때문에 백림에서 플로센부르그로 끌려갔다.

본회퍼는 여기서 자기가 암살하려던 히틀러의 수하 특별명령으로 1945년 4월 9일 이른 새벽에 39세라는 젊은 나이로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와 함께 마지막 몇 주간을 함께 지낸 한 영국인 장교는 그의 마지막을 이렇게 전해 주었다.

“본회퍼는 언제나 살아있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에 깊이 감사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 같았다. 그는 자기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늘 고마워했고 죽음의 날이 다가오는 것을 뻔히 내다보면서 가장 적은 일 뿐만 아니라 삶 그것에 대하여 고마워할 줄 아는 마음의 소유자이었다. … 또 그이만큼 하나님이 생생하게 언제나 몸 가까이 계시는 것을 느끼는 것을 느끼는 사람을 별로 만나보지 못했다. … 1945년 4월 8일 일요일 본회퍼 목사는 간소한 에배를 인도했고 우리 모두에게 심금을 울리는 말씀을 해 주었다. 그가 마지막 기도를 드릴 때 평복차림을 한 사람들이 문을 열고 들어와서 말했다. ‘죄수 본회퍼, 따라오라.’

그것은 우리 죄수에게는 한 가지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곧 교수대였다. 우리는 그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그는 나를 붙잡고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죠, 그러나 나에게는 생의 시작입니다.’고 하는 것이었다. 다음날 그는 플로센부르그에서 죽었다.“

이 이상 그의 위대한 생애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너무나 어려움 속에서 그렇게도 뜨겁게 동족을 사랑하고 그렇게도 투철하게 신앙으로 살아간 그의 모습에 머리가 숙여진다.(출처 : 石浩仁 엮음. 信仰의 偉人像)

1938년 4월에 베를린에서 국가교회의 총회장인 ‘베르너’(Werner)는 히틀러의 생일 선물로 목사들이 ‘히틀러’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일을 계획했다. 목사 신분을 유지한다는 명분을 내새워 모두 ‘히틀러’에게 충성맹세를 하였다. 그러나 ‘디트리히 본회퍼’와 ‘목사 후보생들’은 목숨을 걸고 충성맹세를 거부했다. 과연 어떠한 삶이 개혁주의 신앙일까?

작금에 우리는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행사에 일부는 개혁의 대상자들이라는 이야기가 들려오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아직도 한국교회의 지도자로 군림 한다는 것은 모순되지 않을까? 오직성경 등의 종교개혁 외침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일제치하 때부터 애국을 말하지 않는 신앙(권력)을 보았는가? 애족을 말하지 않는 신앙(권력)은 보았는가? 따라서 ‘최OO’의 부역자로 영화를 누렸던 자들에게 최소한의 양심이라도 남아 있다면, 겸손(謙遜)히 참회하고 이제부터라도 겸허(謙虛)한 삶을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 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사 57:15)

한국장로교신학 학장•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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